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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 장강훈기자] 세계랭킹 1위 탈환을 노리는 고진영(26·솔레어)은 ‘인내의 끝은 달콤함’이라는 확신을 갖고 새 시즌을 출발한다.
지난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최종전인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 우승으로 굴곡진 시즌의 대미를 올해의 선수, 상금왕으로 장식했다. 그는 “시즌 초반 슬럼프 때는 ‘1승이라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할 정도로 안좋았다. 심리적으로 무너져 슬럼프가 6개월 이상 이어질 수 있었는데, 주변의 도움과 사랑으로 그 시간을 3개월로 단축했다. 정말 답답하고, 골프도 하기 싫고,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지만 지나고 보니 ‘인내 끝의 결과는 정말 달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롤러코스터 시즌을 치르며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고진영을 세밑에 화상으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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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로 시작해 눈물로 끝난 한 해
고진영의 2021년은 눈물로 시작해 눈물로 끝났다. 지난해 3월 할머니 별세 소식을 접하고도 코로나 확산 탓에 귀국길에 오르지 못했다. 심리적 허탈감은 경기력 저하로 이어졌다. 5월에는 손목 통증까지 찾아왔다. 빠른 몸통 회전과 완벽에 가까운 볼 스트라이킹으로 ‘송곳아이언’으로 불리던 샷이 들쑥날쑥했다. 정신과 육체에 모두 이상이 생기니 골프가 재미없을 수밖에 없다.
눈물을 참으며 대회에 출전했지만, 샷도 마음도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6월 치른 메이저 LPGA클래식,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에서는 공동 57위, 46위까지 떨어졌다. 출구 없는 터널에 빠진 느낌이었지만, 고진영은 포기를 몰랐다. 7월 첫 대회인 볼런티어 오브 아메리카 클래식에서 시즌 11번째 대회 만에 첫 우승을 따냈다.
그는 “부진에 빠졌을 때 ‘아, 골프 사춘기가 왔구나’라는 생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사춘기를 지나면 성인이 되지 않나. 업그레이드된 선수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말했다. 챔피언 퍼트를 성공한 뒤 한동안 하늘을 올려다본 고진영은 아낌없는 사랑을 보내준 할머니에게 눈물의 우승 트로피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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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진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듯했지만 8월 열린 도쿄올림픽에서 라이벌 넬리 코르다(24·한화큐셀)의 금메달 획득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104주간 지켰던 세계랭킹 1위를 빼앗은 숙적의 활약은 ‘골프 사춘기’를 겪는 고진영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동기부여가 됐다. 그는 “코르다가 세계랭킹 1위이고, 흠잡을 데 없는 선수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는 ‘세계 1위는 나’라는 생각이 있다. 랭킹에 연연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코르다의 금메달 획득 장면을 지켜보며 가슴 속에 열정이 다시 피어나는 것 같다”며 재기를 다짐했다.
국내에 잠시 체류하는 동안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훈련에 매진한 고진영은 올림픽 이후 출전한 캄비아 포틀랜드 클래식 우승을 시작으로 후반기 7개 대회에서 우승 4회, 준우승 1회 등 ‘송곳아이언’의 완벽한 재기를 알렸다. 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에서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3연속시즌 상금왕(350만 2161달러), 통산 두 번째 올해의 선수를 따냈다.
대회 1라운드 후 극심한 손목통증으로 캐디로부터 기권을 권유받았지만, 묵묵히 자신의 샷을 해 따낸 우승이었다. 불안감과 슬픔의 눈물로 시즌을 시작해 좌절을 거쳐 환희의 눈물로 대미를 장식했다. 스스로도 “지난시즌을 돌아보면 대반전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임인년(壬寅年) 새해는 꾸준함으로 기억되는 골퍼가 되고 싶다. 모든 면에서 한 단계 성장한 고진영이기를 원한다”고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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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의 라이벌 코르다 “잘난 게 없다”
승부욕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고진영은 숙명의 라이벌로 부상한 코르다와 세계랭킹 1위 쟁탈전이 적지 않은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그는 “LPGA투어 2년 차 때인 2019년에 넬리가 루키였다. 그래서 동반 라운드를 굉장히 많이 했다. 2주에 한 본꼴은 같이 쳤던 것 같다. 얘기도 많이 했고, 나름 친분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경쟁 구도이기는 하지만, 매너도 좋고 잘 치는 선수다. 많이 배우는 친구”라고 말했다.
구체적인 설명을 요청하자 “티샷부터 퍼팅까지 다 잘한다. 멀리 똑바로 치는데, 여러가지 샷을 구사할 줄 안다. 나이도 어리다”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넬리보다 자신이 나은 점을 꼽아 달라는 부탁에는 “없는 것 같다. 키도 크고, 다리도 예쁘다(웃음). 스윙도 좋다. 실력도 좋고, 성숙한 골퍼라서 내가 나은 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자세를 낮췄다. 골프 사춘기를 겪으며 인격적으로도 한 뼘 성장한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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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PGA투어에서 활동할 때는 물론, LPGA투어 진출 초기와 비교해도 성숙했다는 인상을 준다. 고진영은 “데뷔 초반과 비교하면 성숙해졌다고 생각한다. 프로 골프선수 생활을 하면서 변하는 것도 있는 것 같다”고 돌아봤다. 그러면서 “내 행동이 주니어 선수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행동 하나, 말 하나가 조심스러웠다. 20대 후반으로 접어들어 가볍게 행동하고 싶지 않다. 무게감 있고, 나중에 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한다.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성숙해 보인 비결이 아닌가 싶다”고 설명했다.
불과 0.04 포인트 차로 경합 중인 세계랭킹 1위뿐만 아니라 올시즌에는 더 많은 경쟁자와 겨뤄야 한다. 뉴질랜드 교포 리디아 고(세계랭킹 3위)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는데, 지난겨울 퀄리파잉(Q) 스쿨을 통해 안나린(26·문영그룹)과 최혜진(23·롯데)이 LPGA투어에 입성한다. 안나린은 Q스쿨을 수석으로 통과했고, 최혜진은 고진영의 뒤를 이어 KLPGA투어 대세로 자리잡은 강자다.
그러나 고진영은 “조언이랄 것까진 없지만, 심리, 체력, 기술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은 투어라는 얘기는 해주고 싶다. (이동 거리 탓에) 짐이 많기 때문에 이것 자체로도 꽤 힘들다. 국내와는 달리 미국은 코스마다 다른 잔디가 깔려 있어 잔디별 특성을 직접 부딪쳐보고 느껴야 하는 부담도 있다. 국내에서는 대회 후 하루, 이틀 정도는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는데, 미국은 대회 후 곧바로 비행기로 이동해 다음 대회를 준비해야 한다. 때문에 한국이 많이 그립고 외로움을 느끼기 쉬운 환경”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달리 보면, 개인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을 포기하는 대신 온전히 골프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강조했다. 승부사다운 조언을 하면서도 “내가 조언할 위치는 아닌 것 같다. KLPGA투어 선수들은 워낙 실력이 뛰어나 충분한 경쟁력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세를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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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할 길 멀어 “더 완벽한 추구할 것”
오는 12일 출국해 본격적인 시즌 담금질에 돌입하는 고진영은 “4~5주 정도 동계훈련을 할 계획이다. 구체적인 시즌 목표를 설정하기보다는 매 대회 출전해 완주하는 과정에 집중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KLPGA투어에 데뷔했을 때에는 신인왕 시즌 첫 승 등 목표를 세우기도 했지만, 우승 목표를 세우는 게 ‘행복한 골퍼’가 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대신 체력과 유연성 등 장기 레이스를 치를 수 있는 바탕을 만드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고진영은 “10년 동안 함께 한 트레이너가 동계훈련에 동행한다. 주 2~3회를 기본으로, 많게는 네 번 정도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받는다”고 귀띔했다. ‘송곳아이언’을 유지할 수 있는 최상의 몸상태를 위해 근육량을 늘리지는 않을 계획이다. 그는 “근육이 많으면 몸이 커지는 체형이다. 몸이 커지면 스윙이 무뎌지기 때문에 큰 근육들을 키우는 게 나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유연성과 심폐지구력 향상을 위해 인터벌, 서킷 트레이닝 등으로 체력을 끌어 올리고 있다. 인터벌과 서킷 트레이닝은 지구력뿐만 아니라 순발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 빠른 몸통 회전을 통해 최상의 스윙 스피드를 내는 고진영의 경쟁력은 자신의 체형과 체질을 완벽히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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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연속시즌 올해의 선수로 우뚝 선 데다, 지난시즌 후반기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뽐낸 탓에 올시즌 고진영에 대한 기대가 높을 수밖에 없다. 정작 자신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매 대회 출전하는 것 자체가 큰 동기부여라는 생각으로, 매 대회 집중한다는 생각만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격리 여부에 따라 아시안 스윙이 될 수도, 본토 대회가 될 수도 있다”며 1, 2월 플로리다주에서 열릴 대회에는 불참할 뜻을 내비쳤다. 이르면 3월 4일부터 싱가포르에서 열릴 HSBC 위민스 월드 챔피언십, 늦어도 3월 25일 캘리포니아주 칼즈배드에서 개최되는 JTBC 클래식이 고진영의 올시즌 개막전이 될 전망이다.
고진영은 “감사하게도 2018년 LPGA투어 데뷔 후 지난해까지 매년 1승 이상 따냈다. 올해는 열심히 하면서 재미있는 모습을 팬 여러분께 보이고 싶다. 선수로서뿐만 아니라 사람 고진영으로서도 한 단계 나아질 수 있기를 바란다. 코로나로 힘든 시기였지만, 올해는 코로나가 물러가고 많은 분이 일상이 주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겠다. 많은 응원 부탁한다”며 수줍게 웃었다.
zzang@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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