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태(히딩크)
지난 2002년 7월7일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지휘한 거스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로 돌아가고자 공항에 나선 가운데 경호원 김성태(노란 원)씨가 주변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강영조기자

거스 히딩크-(2002)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는 세계열강 틈바구니에 갇혀 변방으로 취급받던 한국 축구에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심었다. 또 세계적인 수준의 축구 인프라 확보와 재능 있는 ‘2002 키즈’ 발굴로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나라 축구 발전의 근간이 된 4강 신화는 거스 히딩크 감독과 코치진, 그리고 23명 태극전사의 땀으로만 이뤄진 게 아니다. 이들의 빛나는 영광 뒤엔 숨은 조력자가 있다. 스포츠서울은 한일월드컵 20주년을 맞아 숨은 영웅을 조명하고자 한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 남양주=김용일기자] 거스 히딩크 감독 지휘 아래 태극전사들이 2002 한일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루고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던 것 뒤엔 ‘든든한 그림자’가 있었다. 25년째 한국 축구 A대표팀의 ‘철통 경호’를 책임지고 있는 김성태 티알아이(TRI) 인터내셔널 대표다.

1992년 경호업체를 꾸린 김 대표가 축구와 연을 맺은 건 1997년. 평소 ‘축구광’이던 그는 좋아하는 분야를 경호하고 싶은 열정에 ‘안전 제안서’를 들고 대한축구협회(KFA)를 찾았다. 당시만 해도 축구장 안전 환경에 관한 가이드라인이 명확하지 않았을 때다. 김 대표는 해외 사례와 여러 서적을 연구해 축구장 규격부터 시작해서 테크니컬 라인에서 지도자가 어떻게 움직이고, 선수가 언제 몸을 푸는 지 등까지 고려한 ‘축구장 안전 개념’을 만들었다. 이런 노력으로 KFA에 신임을 얻었고 각종 A매치 및 이벤트에 참가해 성공적으로 경호했다.

그리고 2002 한일월드컵에서 월드컵 조직위 내 안전부서(국정원·경찰 등 구성)가 있었으나 실질적 대표팀 전담 경호로 투입됐다. 김 대표는 최근 경기도 남양주시 자택에서 스포츠서울과 만나 “조직위 안전부는 국가 주도 경호가 일반적이다. 대표팀은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경호업체가 필요해서 우리가 기회를 얻었는데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었다”고 웃었다.

2002 FIFA 한일월드컵 축구 관중 및 응원(한국응원단,붉은악마)
2002 한일월드컵 16강전 한국-이탈리아전이 열린 대전월드컵경기장 모습.

안정환-2002
연장 안정환 골든골 당시 세리머니.

◇“비표 없이 등장한 토티, 20분 벌 세웠죠”

한국 축구 역대 최고 명승부로 꼽히는 한일월드컵 이탈리아와 16강전. 한국은 거친 플레이를 일삼은 이탈리아에 0-1로 뒤지다가 후반 종료 직전 설기현이 동점골을 넣었고, 연장에서 전반 페널티킥을 실축한 안정환이 헤딩 골든골을 터뜨리며 드라마틱한 2-1 역전승을 거뒀다. 김 대표도 20년 전 현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꼽는다. 그는 “이 일을 하다보니 감을 믿는 편이다. 그때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이탈리아전을 했는데 킥오프 전 “대~한민국!” 함성을 듣는데 유독 소름이 돋더라. ‘오늘 절대 지지 않겠구나’라고 여겼다”고 떠올렸다.

단순히 승리로 귀결돼서 기억에 남는 게 아니다. 이탈리아 대표 스타인 프란체스코 토티와 ‘악연’도 있다. 김 대표는 “토티가 몇몇 동료와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 출입 비표를 목에 걸지 않았더라”며 “그 전에 다른 경기장에서 아프리카 선수단 버스에 주한대사관이 무단으로 동승하거나, 위조 비표 사례 등이 나와 통제를 강화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상징) 트레이닝복, 유니폼을 입지 않았느냐’며 그냥 들어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토티는 한국전을 앞두고 “한 골이면 충분하다”는 거만한 코멘트로 ‘국민 밉상’이었는데, ‘원칙주의자’ 김 대표와 제대로 마주했다. 토티는 ‘얼굴이 명함’인 자신을 막아선 것에 더욱더 격분했다고 한다.

2002 FIFA 한일월드컵 축구 본선 16강전 한국-이탈리아
2002 한일월드컵 16강 당시 경기 중 프란체스코 토티(왼쪽)와 마주한 거스 히딩크 감독.

2002 FIFA 한일월드컵 축구 본선 16강전 한국-이탈리아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퇴장하는 토티의 모습. 스포츠서울DB

김 대표는 “솔직히 토티를 왜 몰랐겠냐”고 웃더니 “처음엔 (신분 입증이 가능한) 유명 선수이니 조금만 붙잡을까 생각했는데 그의 태도에 기분이 나빴다. 20분 넘게 막은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국제축구연맹(FIFA) 코디네이터까지 달려와 비표를 정상적으로 걸게 한 뒤에야 경기장에 입장시켰다. 토티가 이때부터 평정심을 잃었던걸까. 그는 경기 내내 흥분하더니 연장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경고누적 퇴장, 한국의 8강행에 이바지했다. 김 대표는 이 얘기에 “그러고보니 나도 8강에 나름대로 일조한 것 아니냐”고 웃었다.

2002 FIFA 한일월드컵 축구 본선 8강전 한국-스페인
한국 선수들이 스페인과 8강전에서 승부차기에서 이긴 뒤 환호하고 있다.

2002 FIFA 한일월드컵 축구 본선 8강전 한국-스페인

◇‘4강 신화 빛고을’…장외에선 조폭과 맞짱을?

스페인을 승부차기로 누르고 4강 신화를 쓴 ‘빛고을’ 광주도 진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광주월드컵경기장 앞엔 노점상이 줄지어 있었는데, 경호 동선상 이들에게 협조를 구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김 대표는 조직폭력원과 맞서기도 했다. KFA 한 관계자는 “조폭이 물러서지 않자 김 대표가 현장에서 두목과 맞짱으로 정리한 건 유명한 일화”라고 전했다.

김 대표는 “당시엔 노점상, 암표상까지 (조폭)조직에 포함돼 하나로 움직이는 일이 잦았다. (축구 뿐 아니라) 여러 행사 경호를 할 때 그들과 정리해야 할 때가 잦았다. 한 번은 서울 체조경기장에서 그쪽 보스랑 나랑 방 안에 들어가서 (요구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붙은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싸우면서 정든다고 했던가. 세월이 흘러 당시 한 조직원이 행사장에서 김 대표를 보고 “오랜만”이라고 반가워하며 손을 건넨 적도 있단다.

거스 히딩크

거스 히딩크
스페인전 직후 예고없던 히딩크 감독의 관중석 향한 볼 전달 세리머니.

4강 신화 직후 히딩크 감독이 관중에게 공을 차는 예고 없는 세리머니를 했을 때도 김 대표는 옆에 있었다. 그는 “그땐 경호원 입장에서는 돌발행동이었다”며 “히딩크 감독은 당대 최고 유명인으로 봐야하기에 움직임 하나하나 예의주시했다. 그 순간 여러 군데서 경호원이 움직였다”고 떠올렸다.

김성태(경호원)
김성태 티알아이(TRI) 인터내셔널 대표가 최근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자택에서 스포츠서울과 인터뷰한 뒤 포즈를 하고 있다. 남양주 | 김용일기자

축구를 통해 경호의 희열과 성취를 더욱더 얻었다는 김 대표는 6월 A매치 4연전에 나서는 ‘벤투호’ 지킴이로도 뜬다. 그는 K리그 안전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25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나 그는 여전히 매의 눈으로 축구장을 바라본다. 그는 “철학은 늘 같다. ‘모두를 의심하라’, ‘모든 것을 의심하라’. 모든 국민이 불안감 없이 축구를 즐기도록 앞으로 더 모든 것을 쏟겠다”고 다짐했다.

kyi0486@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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