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강동희, 현주엽, 방성윤, 김승현. 사진 | 스포츠서울 DB
날씨가 추워지며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이와 함께 겨울을 대표하는 농구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번 '2014~2015 KCC 프로농구'는 새롭게 도입된 국제농구연맹(FIBA) 룰과 이승현, 김준일, 김지후, 허웅 등 스타성과 실력을 겸비한 신인들의 활약으로 그 관심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그리고 이상민, 문경은 등 과거 수많은 나정이들을 열광시켰던 농구대잔치 세대들이 어느새 프로팀 감독을 맡아 지도자로 변신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과거 최고의 선수시절을 보낸 스타들의 안타까운 몰락도 적지 않았다. 한국농구를 주름잡은 최고의 스타였지만 한순간의 잘못으로 오점을 남긴 과거의 농구 스타들을 조명한다.
◇ 승부조작, 영구제명 된 강동희
강동희. 사진 |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프로농구에는 최고의 가드 계보가 있다. 현재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울산 모비스의 양동근, 전주 KCC의 김태술, 서울 SK의 김선형이 있다. 그리고 그 윗세대로 현재 서울 삼성의 감독을 맡고 있는 이상민,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김승현이 있다. 그리고 이들의 위, 프로농구 1세대 최고의 가드는 강동희였다. 강동희는 한국 농구를 대표했던 최고의 포인트 가드로 활약했다. 강동희는 중앙대 졸업 후 기아자동차에 입단하며 허-동-택(허재, 강동희, 김유택) 트리오라는 강력한 라인업을 구축하며 실업 농구의 강자로 군림했다. 은퇴 후 해외 연수를 거쳐 아무런 인연이 없던 원주 동부의 전창진(현 부산 KT)감독의 코치로 들어갔고 2009년 전창진 감독이 부산 KT로 떠나자 그 자리를 이었다. 그리고 강동희는 스타플레이어 출신 감독은 성공하기 힘들다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뜨렸다. 2010~2011시즌 예상을 깨고 챔피언 결정전까지 진출했고 그 다음 해는 역대 최단 경기, 최고 승률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최종 우승은 안양 KGC에 내줬지만 부임 2년 만에 팀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놨다. 그리고 그것이 강동희의 농구인생 마지막 족적이 됐다. 2013년 프로농구에 승부조작 파동이 일어났다. 강동희 역시 승부조작 연루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논란이 불거졌던 초기 강동희는 혐의를 극구 부인했지만 검찰의 2차 조사가 끝난 후 승부조작 사실을 인정했다. 강동희는 2013년 8월 8일 1심에서 징역 10개월, 추징금 4700만 원의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KBL은 상벌위원회를 열어 그를 영구제명 조치했다. 동부는 불명예 퇴진한 강동희 감독의 후임으로 이충희 감독을 선임했고 신인 드래프트 3순위, 외국인 드래프트 1순위 선발권을 얻어 두경민, 허버트 힐을 선발해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최하위를 기록하며 바닥까지 떨어졌다. 이충희 감독은 자진사퇴했고 그 뒤를 이어 김영만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선임된 후 정식 감독으로 승격해 이번 시즌을 이끌고 있다.
◇ 위증 혐의로 벌금까지, '매직히포' 현주엽
왼쪽부터 김태환, 손우주, 현주엽. 사진 |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현재 MBC 스포츠플러스를 통해 해설위원으로 데뷔한 현주엽은 과거 농구대잔치 시절, 여성 팬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꽃미남 연세대에 맞서 전희철과 함께 터프한 플레이 스타일로 남성 팬들의 지지를 받았다. 현주엽은 프로 데뷔 이후에도 대학시절 못지않은 터프한 스타일로 자신만의 플레이를 펼치며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다. 하지만 무릎 부상과 외국인 용병 선수들에 밀리며 점차 자리를 잃어갔다. 결국 플레이스타일 역시 '포인트포워드' 형태로 바뀌며 자신의 색깔을 잃었고 2009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은퇴 후 악재가 그를 덮쳤다. 현주엽은 지난 2009년 3월 투자회사를 통해 알게 된 A씨와 B씨를 믿고 24억 원에 달하는 금액을 투자했다가 원금을 모두 잃었고 이들을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그리고 지난 17일 위증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다. 수원지법 형사1단독 이지현 판사는 법정에서 거짓 진술을 한 현주엽에게 벌금 150만 원을 선고했다. 재판 과정에서 현주엽은 증인으로 나와 "A가 생일파티 자리에서 B씨에게 투자할 것을 권유했다"고 진술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재판부는 "증인으로 출석해 사실만을 말하기로 선서했음에도 허위 진술을 한 점이 인정된다"며 그를 벌금형에 처했다. 그리고 그가 더욱 안타까운 것은 늘 최고의 자리에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대학시절 작은 연맹대회 등에 우승한 경험이 있긴 하나 농구대잔치 우승은 없고 프로무대 역시 챔피언 결정전조차 진출하지 못했다. 비록 프로무대는 아니지만 우승은 2002 부산아시안게임 뿐이다.
◇ NBA 노리던 천재, 폭행혐의로 법정까지, 방성윤
방성윤. 사진 | 스포츠서울 DB
미국프로농구(NBA)를 노리던 선수는 하승진(전주 KCC)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다. 미스터 빅뱅, 방성윤이다. 방성윤은 청소년대표 시절부터 압도적인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활약했고 2002 부산아시안게임 농구 대표팀에 막내로 합류, 금메달을 획득해 병역혜택도 받았다. 이후 방성윤은 NBA 진출을 선언했고 NBA 하부리그 NBDL 드래프트를 신청해 로어노크 대즐에 지명됐다. 2004~2005 시즌 평균 12.5점으로 준수한 활약을 펼쳤지만 NBA 진출은 실패했다. 이후 부산 KTF(현 부산 KT)가 그를 1라운드에 지명했지만 서울 SK 나이츠와 3:3 트레이드를 통해 지명권을 넘겼고 결국 서울 SK에서 뛰게됐다. 방성윤은 프로무대에서 국내선수 중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했지만 늘 부상에 시달렸다. 특히 2007~2008 시즌에는 전주 KCC전에서 코트에 미끄러지며 큰 부상을 당했다. 당시 방성윤은 코트가 울릴 정도로 큰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에서 부상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 부상으로 왼쪽 무릎인대가 파열됐지만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위해 조기복귀를 결정했었다. 이후로도 방성윤은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렸고 결국 30세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를 결정했다.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방성윤은 지난해 3월 폭행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방성윤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A씨에 따르면 2012년 4월부터 8월까지 방성윤에게 수차례 폭행을 당했고 아이스하키 스틱, 쇠파이프, 따귀 등으로 40~50대가량을 맞았다. 방성윤이 중요한 서류가 있는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그것이 A씨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방성윤은 "남자끼리 장난친 것이다" 라고 주장했지만 검찰에 송치됐고 집단·흉기 등 상해혐의로 재판 중이다. 그리고 지난 3월에는 사기 혐의로 기소됐다. 방성윤은 공증까지 된 상황에서 건물 보증금을 속여 빼앗은 혐의로 고소인을 상대로 사기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 이면게약파동, 김승현
왼쪽부터 서장훈, 김승현, 황진원. 사진 | 박진업기자 upandup@sportsseoul.com
현재 최고의 가드로 활약하고 있는 양동근, 김태술, 김선형 전, 최고의 가드는 두말할 여지없이 김승현이었다. 비록 그의 전성기는 길지 않았지만 한국농구 역사상 최고의 임팩트를 보여준 선수다. 그는 2001년 드래프트에서 3순위로 대구 오리온스(현 고양 오리온스)에 지명됐고 데뷔와 동시에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김승현의 등장은 KBL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김승현 입단 전 충격의 32연패를 한 동양은 그의 입단 후 단숨에 선두권으로 치고 올라갔고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김승현은 외국인 선수 마르커스 힉스와 최고의 호흡을 보여주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는 이 활약으로 신인 선수상과 MVP를 동시에 수상했다. 신인이 신인 선수상과 MVP를 동시 수상한 것은 한국농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고 지금까지 그 유례가 없다. 김승현은 그해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까지 따며 농구선수로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냈다. 이 일들은 불과 1년 사이에 모두 일어났다. 하지만 단시간에 최고의 자리에 오른 만큼 추락도 빨랐다.
김승현은 2007~2008시즌 부상으로 21경기 밖에 소화하지 못하며 점차 부진에 빠졌다. 결국 2009년 이면계약파동으로 선수생활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당시 김승현은 2009년 비시즌 연봉조정기간에 연봉을 인상을 요청했다. 하지만 부상과 부진으로 구단은 이를 거부했다. 이후 이면계약을 맺은 사실이 공개돼 KBL은 18경기의 출장정지를 내린다. 김승현은 2010년 11월 구단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해 그들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구단과 관계가 틀어진 그는 2010~2011 시즌 단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고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됐다. 이에 김승현은 구단과 조정에 나섰고 소송에서 이겨 받게 될 돈을 포기하고 트레이드 약속을 받아내 서울 삼성의 김동욱과 트레이드 됐다. 모든 농구팬들은 그의 부활을 기다렸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삼성에서 뛴 3시즌 동안 그가 보여준 것은 간혹 나온 화려한 플레이 말고는 없었다. 긴 공백기를 이겨내지 못했다. 수비는 여전히 부실했고 턴오버도 많았다. 공격은 전성기 시절 날카로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에 부상까지 겹치며 경기 출장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2014~2015시즌을 앞두고 이상민 체제로 전환한 삼성은 그와 계약을 포기했고 김승현은 2014년 5월 15일, 파란만장했던 선수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김도곤 인턴기자 inaddition@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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