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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에 봄이 왔다. 순천 선암사 너른 뜰에도 광양에 피어난 설중매 꽃술 속에도, 여수 밤바다에 봄이 깃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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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靑春). 젊은 커플이 봄 여행을 즐기고 있다. 여수 순천 광양은 한번에 봄 마중 나가기 딱 좋은 곳이다.
[스포츠서울 이우석기자]춘래불사춘이라더니, 남도 땅은 벌써 온풍이 한가득이다. 바람 찬 흥남부두처럼 서울에 눈이 펑펑 내린 지난 주 남쪽바다 볕좋은 광양, 순천, 여수는 봄맞이가 한창이었다. 눈부신 일직선 햇볕이 나뭇잎 사이를 파고들어 메마른 가지에 움을 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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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아닌 봄눈에 광양에 모습을 드러낸 설중매.
땅은 이미 알고 있다. 기어코 봄이 왔음을. 한오백년 꽁꽁 언 채로 있을 것만 같던 벌판에 스멀스멀 아지랭이가 피어오른다. 코끼리 가죽처럼 메마른 땅이 고개만 잠깐 돌렸다 다시 보면 그새 누군가 한번 녹색 붓을 들어 덧칠을 했다. 강냉이같은 매화가 툭툭 터지고 목련은 꼭 쥐었던 주먹을 슬쩍 펼 기세다.그것으로도 모자라 깊은 곳에서 솟아난 기운은 뿌리를 통해 나무로 올라 향긋한 고로쇠 물을 펑펑 쏟아낸다. 이젠 누가 뭐래도 남도에는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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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선암사 승선교.
◇사랑해, 여광순

순천과 광양, 여수는 한묶음이다. 이 세 도시는 이순신대교와 남해고속도로, 순천완주고속도로를 통해 근사한 삼각형을 이뤘다. ‘트리오(주방세제가 아님)’처럼 서로 보완하고 화음을 이끌어내는 삼합(三合)이다.

한려수도의 출발점으로 멋진 섬을 360여 개나 가진 여수, 대한민국의 대표 습지 순천만과 전통미를 오롯이 간직한 낙안읍성을 품은 순천, 그리고 기세좋은 호남정맥의 꼭지 백운산과 넉넉한 섬진강을 안은 광양. ‘여광순’이 여행 벨트로서 만만찮은 매력을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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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웃장 국밥. 괴목식당.

음식 맛 좋기로 소문난 남도 땅 아닌가. 근사한 볼거리는 물론, 맛좋은 먹거리도 많다. 봄만 해도 그렇다. 여수 바다에는 새조개가 나고 금풍쉥이(군평선이)가 팔딱 뛴다. 광양불고기, 백운산 닭숯불구이가 불을 쬐며 대기 중이며 잎새주 한잔에 얼큰히 취하더라도 걱정없다. 섬진강 재첩국이 시린 속을 말끔히 걷어준다. 따끈한 순천 웃장 국밥에 치즈처럼 눅진한 돼지머리 수육 한 접시. 주인공만 신이 난게 아니다. 신들만 먹는다는 여수 돌산 갓김치에 순천 고들빼기까지 주연급 조연들이 식탁을 호령한다. 밥통 깨나 크다고 자부했지만 배에 딱 한 보따리 넣고 뒹굴뒹굴 굴러다닐 듯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도통 봄이 올 기세가 안보이길래 남도 땅으로 제법 먼 마중을 갔다.

선암매를 보러갔지만 아직 일러 안폈대도 그만이란 생각이다. 입구부터 일주만까지 이르는 오솔길이 참 좋다. 가로로 쪼이는 봄볕에 온기가 실렸다. 제법 힘좋은 봄볕은 앙상한 나뭇가지 하나하나마다 비춰 빛을 내고, 바닥에는 선명한 스트라이프 무늬를 새겨 이른 아침부터 매화를 찾는 길손을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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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 내려앉은 순천 선암사.

선암사의 매화를 따로 일러 선암매라 한다. 천연기념물(제488호)로 지정될 만큼 근사한 매화다. 비록 때가 미치지 못해 고운 자태를 볼 수는 없었지만 천년 고찰 경내에 내려앉은 봄은 발길을 붙들기 충분하다. 승선교(보물 제400호)를 지나 절집에 들어섰다. 뺨을 만지듯 돌담을 어루만지며 봄기운을 느낀다. 아무 꽃도 피지 않은, 하지만 이미 완연한 봄 내음을 풍기고 있다. 노랑을 감춘 아침 볕이 냉기를 쫓아버린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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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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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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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의 봄.

보온성 좋은 꺼먼색 등산복도 이미 철이 지난 듯 하다. 진달래며 튤립 등 봄꽃을 닮은 등산객들이 계절의 갈림길에서 방향을 틀어 송광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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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드라마세트장.

서둘러 내려와 젊은 여행객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순천 드라마세트장으로 향했다. ‘응팔’의 영향인지 촌스러운 교복과 교련복을 입은 학생들이 60~70년대 거리를 누비고 있다. ‘러-브 스토리’를 상영하는 순양극장 앞에도 알프스 양화점 앞에도 심지어 청계천 판자촌에도 셀카봉들이 공중으로 치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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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드라마세트장에 가득 모인 젊은 여행객들이 옛 교복을 입고 인증샷을 촬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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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순천 드라마세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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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 한 장면 같은 순천 드라마세트장. 교복과 교련복을 대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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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드라마세트장 청계천 판자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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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드라마세트장에 놀러온 커플 여행객.

양철지붕과 누더기 판자집이 다닥다닥 붙어 하늘을 향해 쌓아올린 달동네도 있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골목에 젊은 관광객이 찾아올리 없겠지만 영화와 드라마를 찍는 세트장이니 저마다 교복을 빌려입고 주인공 행세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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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순천 드라마세트장.

예쁘다. 흑백사진에나 어울릴만한 차림이지만 ‘교련복’과 ‘세라복’을 챙겨입은 젊은 커플들이 참 보기 좋다. 그야말로 청춘이다. 아직 어린 봄은 푸른 색을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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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꽃망울을 틔우기 시작한 광양 매화.

◇땅은 나무를 통해 봄을 알린다

볕좋은 광양은 땅에 군불을 땠는지 훈훈하다. 이번엔 입으로 봄을 느껴보기 위해 옥룡면 동동마을에 갔다. 여기서 오늘 터져나온 백운산 고로쇠 수액을 실컷 마셔보기로 작정한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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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백운산 고로쇠. 이 동네에선 함지박 하나는 마셔야 “고로쇠 좀 묵었네” 한다.

고로쇠와 닭을 파는 ‘쌍둥이 민박’ 측의 설명에 따르면 고로쇠 물은 원래 한두 잔 먹는게 아니란다. 10리터 이상 마셔야 한단다. 그러기 위해 절절 끓는 방에서 오랜 시간을 두고 마셔야 한다. 고로쇠를 많이 마시면 한기를 느끼기 때문이다. 물이 당기게 짭조롬한 것을 함께 먹는다. 닭숯불구이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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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숯불구이와 나물 등을 차려놓고 봄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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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의 명물 닭숯불구이, 옥룡면 동동마을 쌍둥이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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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를 다듬는 할머니의 손끝에도 봄은 이미 배어들었다.

고로쇠 반 말을 마시는게 만만찮다. 덕선이 엄마가 했는지 밥상 위에 산더미처럼 내온 나물을 먹어가며 고로쇠를 마신다. 배가 동그랗게 변하는게 보인다. 여덟 대접을 마신 후 소쿠리를 엎어놓은 만삭의 몸으로 뻗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영 불편했지만 오랜만에 몸에 상여금을 준 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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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꽃망울을 틔우기 시작한 광양 매화.

매화의 고장답게 곳곳에 매화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만개해서 봄바람에 물결치는 것은 아니지만 앙상한 가지마다 툭툭 틔운 꽃송이를 달고 있다. 진한 매향 역시 바람에 섞여 사방에 계절이 바뀌었음을 알린다.

백운산 줄기를 꿰는 도로를 달리며 창밖에 눈을 팔게 된다. 이제야 방광에 도착한 고로쇠 탓에 몇 번이고 차를 세워야 했지만 길가마다 피어난 매화 덕에 번거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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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면 더욱 빛을 발하는 여수밤바다.
◇너 뭐하니, 난 여수밤바다

광양 중마동에서 이순신대교와 묘도대교를 지나면 바로 오동도 쪽이 나온다. 이곳에 숙소를 정한 것은 바로 동백과 여수밤바다를 보기 위함이다. 여천산업단지를 지나며 벌써 가슴설렌다. 아직 몸에는 고로쇠가 흐르고 있지만 한번도 쉬지않고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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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산대교 전망대에서 바라본 여수 야경.

해는 저물어 어스름한 불빛만 남긴 채 섬들 사이로 숨었다. 돌산대교 옆 전망대(사실은 해양케이블카 정류장)에 올라 여수밤바다를 감상했다. 밤이 오면 미항 여수의 앞바다는 색색의 빛으로 물든다. 돌산대교와 케이블카가 스스로 오색 빛을 발하며 검은 바다에 살짜기 색을 입힌다.

기막힌 야경이 있어 여행이 두배 더 즐겁다. 제법 쌀쌀한 것도 잊은 채 한 시간 여 언덕 위에 섰다가 내려와 서시장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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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서시장 포장마차. 누군가 앉아있는데 꼭 아는 사람 같아 좋다.

여수 서시장은 연등천변에 있는 재래 시장으로 낮에는 해산물 등 푸짐한 쇼핑거리가 있는 곳이다. 밤에는 하늘색 줄무늬 포장마차 들이 천변에 줄줄이 들어서 추억을 남기기에 딱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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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서시장 포장마차의 명물 삼합.

맞아. 80년대까지 포장마차는 죄다 저런 색 비닐 천막이었다. 흔들리는 카바이드 불빛 아래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술잔을 기울이던 바로 그 곳이 여수 서시장변에 있다. 분위기는 추억과 얼추 비슷하다. 카바이드 대신 육십촉 백열등이 달리고 냉장고가 생겼다는 점을 제외하곤 똑같다. 유리관 안에는 금풍쉥이와 섭, 낙지가 들었고 한 켠에는 생선을 굽는 가스불이 놓여있다. 새우와 관자, 낙지, 김치를 함께 볶아내는 삼합(그럼 사합이 아닌가)을 앞에 놓고 엉덩이보다 좁은 나무 의자에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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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추억 속 한 장면을 빼닮은 여수 서시장 포장마차 골목.

몇시가 됐는지 따지지 않고 그때 그 친구들에게 카톡 문자를 보내고 난 후 추억에 잠겨있다. 여수 밤바다에서. 아니 여수 봄바다에서.

demory@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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