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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스포츠서울 김용일기자]1980년대 고(故) 이상천 선생 이후 ‘제2 중흥기’를 맞은 한국 당구는 2016년에도 숱한 화제를 뿌렸다. 그 중심엔 ‘당구계 손흥민’으로 불리는 1992년생 김행직(24·전남연맹)의 세계3쿠션선수권 준우승 신화가 한몫했다. 지난해 11월 20일이다. 3쿠션 본고장으로 불리는 프랑스의 보르도에서 열린 당구 최고 권위 대회인 세계3쿠션선수권에서 대표팀 막내 김행직이 생애 처음 출전에도 톱랭커들을 연달아 무너뜨리며 준우승했다. 비록 18세나 많은 ‘대선배’이자 통산 3회 우승에 빛나는 다니엘 산체스(스페인)에게 결승에서 패했으나 40명 이상이 참가하기 시작한 2003년 대회 이후 역대 최연소 결승 진출자로 이름을 남겼다.
당시 세계랭킹 18위이던 그는 현재 6위(지난해 12월 기준)까지 치솟았다. 고교 1학년 시절인 지난 2007년 스페인 세계주니어선수권 챔피언에 오른 김행직은 2010년 이후 3년 연속 이 대회 정상에 오르며 사상 최초로 4회 우승 대기록을 세웠다. 2015년 아시아선수권을 제패했고 역대 최연소 국내 랭킹 1위에 올랐다. 한국 선수로는 유일하게 독일 프로리그를 경험했고 아버지에게 당구를 배워 동갑내기 축구스타 손흥민과 비슷한 인생 궤적으로 주목받는다. 스포츠서울은 지난달 말 김행직의 아버지 김연구(47)씨가 경영중인 인천 소재 김행직당구클럽을 찾아 ‘당구부자’와 신년인터뷰를 했다. 세계선수권 호성적으로 당구 인생의 또다른 전환점을 맞은 김행직과 그를 바라보는 아버지는 가슴을 열고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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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서 쌓은 2년 내공, 마침내 꽃을 피우다
‘김행직 보르도 세계선수권 준우승!’ 김행직당구클럽을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건 출입문 앞에 걸린 현수막이다. 아버지 김씨는 기자가 현수막을 보고 있자 수줍은 듯 “막판에 기회가 있었는데…”라며 못내 아들이 우승을 놓친 것을 아쉬워했다. 김행직은 “16강 8강 4강 때처럼 집중해서 쳤으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텐데 경험 많은 산체스와 만나서 그런지 조급했던 것 같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김행직은 조별리그를 가볍게 통과한 뒤 토너먼트에서도 공격적인 샷으로 승승장구했다. 40점 단판 후구 방식에서 그는 좀처럼 리드를 내주지 않으면서 이탈리아의 마르코 자네티(5위) 2003년 챔피언 출신인 터키의 세미 세이기너(17위) 등을 연달아 눌렀다. 하지만 결승에선 산체스의 노련한 샷에 흔들렸고 막판까지 뒤지다가 무서운 뒷심을 발휘 34-36까지 따라붙었다. 산체스가 실수를 연달아 범해 절호의 기회를 잡았지만 이때 긴장한 나머지 점수를 보태지 못했다. 김씨는 “행직이가 다른 대회에서 산체스랑 할 때 크게 밀린 적이 없어서 할만하다고 여겼는데 확실히 중압감이 있더라”고 했다. 오히려 긴장될 때 초반 스퍼트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된 계기다.
전북 익산에서 당구장을 경영한 아버지 영향으로 3세 때 큐를 잡은 김행직. 그가 6세 때 아버지는 당구장 사업을 접고 고깃집을 냈다. 더는 당구와 인연을 맺지 못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다시 당구장에 데려갔고 당구의 기본기부터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중학교 2학년 때 전국체전 학생부는 물론 처음으로 성인 전국대회를 제패했다. 결국 익산에서 초중학교를 보내다가 당구부가 창단된 수원 매탄고에 진학했다. 고교 시절 주니어 무대에선 적수가 없을 정도였다. 김행직 인생의 큰 결심은 이때다. 2011년 꿈꾸던 한국체대 입학을 포기하고 당구를 배우기 위해 한 지인 소개로 독일 분데스리가 무대에 진출한다.
김씨는 “나와 행직이 모두 세계챔피언 꿈을 갖고 살았는데 다 얻을 수는 없다. (대학 대신)큰 세계에 도전하자고 했다”고 말했다. 김행직은 “두 시즌을 경험했는데 정말 종일 당구만 생각했다. 내 전 경기를 캠코더로 촬영해서 분석에 분석을 거듭했다”고 강조했다. 1부 1위 팀인 호스터에크에서 뛰었다. 3쿠션 황태자 토브욘 브롬달(스웨덴)이 몸담고 있었다. 외국인 선수 출전은 경기마다 1명씩이어서 입단 첫해 브롬달에게 밀렸지만 이듬해 더 많이 출전하며 14승이나 따냈다. 2013년 군 문제로 귀국했지만 독일 시절 내공이 이제 서서히 나오고 있다. 김행직은 “당구는 세계적인 선수한테 배워도 곧바로 실력이 느는 게 아니다. 모든 게 누적이 돼 기량이 되는 것인데 그때 열심히 해놨기에 나이가 한 살씩 들면서 성숙한 기량이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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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 안 했다면? “걸출한 왼손투수 나왔으려나”
아버지가 말하는 당구 제자 김행직은 ‘모범생’이다. 최근 전국대회에서 두각을 보이는 둘째 김태관(21)에게 채찍을 가했다면 첫째에겐 격려 수준이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알아서 잘해서 크게 말하지 않는다. 난 그저 기술적으로 알려주면서도 행직이가 연습할 땐 3시간이고,5시간이고 옆에서 조용히 바라만본다.” 김행직은 “오죽하면 (아버지가)독일에 있을 때도 한 번도 오지 않으셨겠나. 그만큼 믿음이 크다”고 웃었다. 가끔은 후회도 한단다. 김씨는 “아들이 너무 당구만 바라보고 살아와서 다른 세계를 못 보여준 게 아닌가…”고 되돌아봤다. 이에 김행직은 “원망은 없다. 내가 좋아서한 것이니까”라고 답했다. 혹시 당구를 안했다면? 김행직은 “골프나 야구를 하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더 인기종목이니까. 지금도 아버지는 손자 왼손투수(부자 모두 왼손잡이) 시킨다고 난리다”고 웃었다. 김씨는 “나도 행직이도 어렸을 때 다 야구를 좋아했다. 동네 야구부가 있었으면 시켰을 지도 모르겠다”고 받아쳤다. 비록 아들이 준우승했지만 아버지 휴대전화엔 ‘아들 챔피언’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어느덧 당구부자가 바라던 세계챔피언 고지가 조금씩 보인다.
김씨는 “최근 당구장 금연법도 통과됐는데 당구장을 경영해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당구가 더 나은 이미지로 발돋움해서 프로화의 초석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 김행직도 “말만 프로여서는 안 된다. 나부터 더 프로답게 훈련하고 자기관리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 2017년엔 한국 당구가 한걸음 더 나아가도록 보탬이 되겠다”고 활짝 웃었다.
kyi0486@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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