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박성오 회장이 퇴임하면서 대한당구협회는 탁광렬 씨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탁 회장은 1년3개월간만 직무를 수행하고 물러나게 되고, 대한당구협회는 다시 1982년 3월 박성오 회장 체제가 가동되었다.
▶당구장 영업시간 제한 해제로 최대 전성기 누려
1971년에 시작해 어느덧 11회를 맞은 한일당구대회는 대한당구협회 최대 공적 사업이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개최된 한일당구대회는 1981년에는 일본에서 열리는 해였다. 한국대표팀 감독에 변기선 씨가 선임되었고 10여 명의 한국대표선수들이 출전했다. 홈어웨이 방식으로 개최된 한일당구대회를 통해 한국당구는 경기력 향상은 물론 대중스포츠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1980년대 전국 당구장 3만5천여 개 난립
1981년 전두환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면서 당구장도 영업시간 제한의 족쇄가 풀린다. 24시간 영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면서 당구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당구 동호인들이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있게 당구를 즐길 수 있게 되면서 당구장 매출은 수직상승했다.
‘3저 현상’에 힘입어 내수 경기가 살아나 ‘지나가던 개도 1만 원 권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만큼 당시 한국 경제는 호황을 누렸는데 야간통행금지 해제에 힘입어 유흥업소와 함께 당구장이 가장 큰 수혜를 입었다. 전국에 걸쳐 당구장이 3만5천여 개로 늘어났고 간판만 걸어도 손님들이 모여들만큼 전성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피해자도 속출했다. 허가제로 인해 권리금을 주고 당구장을 매입한 경영주들은 권리 자체가 소멸되어 적지 않은 재산권을 잃어버렸다. 반대로 당구용품을 제조 판매하는 회사들과 시설업자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이익을 챙겼다.
1995년 한국당구대제전이 열린 88체육관 전경.
▶경기인들이 구성한 대한당구협회, 당구장 주인들이 장악
1980년대까지 한국 당구는 대한당구협회가 주도했다. 대한당구협회는 많은 업적을 쌓으며 당구발전에 절대적 기여를 한 조직이었다. 협회가 출범할 때 구성원들은 말 그대로 그냥 당구가 좋아서, 또는 경기인의 자부심으로 협회를 운영했다.
그러나 53개 지부를 거느린 거대 조직으로 발전하면서 이해관계가 얽히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조직 내부 사정이 복잡하게 변하게 된다. 협회 구성원들이 당구 전문인에서 당구장 주인들로 바뀌면서 각종 사업과 대회보다는 오직 이익을 내는데 만 급급해 경기인들과 불협화음이 계속 됐다.
당시 협회의 1개 지부에서 거둬들이는 회비 및 가입비만도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서 지부의 재정 형편이 중앙회를 능가하는 이상한 구조로 변해버린 것이다. 전국 3만5천여 당구장들이 회원으로 있는 대한당구협회 중앙회를 자연스럽게 이들이 장악하면서 경기인들과는 물과 기름처럼 겉돌게 된다.
▶경기연맹에 참여하지 못한 김문장 1985년 대한당구회 조직
이를 지켜보던 경기인들이 다시 힘을 합쳐 박병문 선수와 김용석 선수의 주도로 1981년 대한당구경기연맹을 조직하게 된다. 대한당구경기연맹은 조동성 양귀문 김명석 등이 참여 하면서 임의조직이었지만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한다. 시도 조직도 구성되었고 전국규모대회도 개최하면서 자리를 잡아 나갔다. 초대회장에 조동성 씨를 추대하고 김명석 이상천 정상철 변기선 양귀문 신항균 등 대한민국 최정상 선수들이 참여하면서 순항했다.
1985년 당구인밤에서 김영재 회장과 김문장 사무총장.
대한당구경기연맹은 1984년 김문장 씨가 광산사업을 위해 당구계를 떠난 사이 구성되었다. 이후 김문장 씨가 합류의 뜻을 밝혔지만 몇몇 인사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이에 김문장 씨가 김영재 김시창 강두석 김한기 남성우 임영렬 유한상 양귀문 김주린 김영철 이한종 김상호 정인수 등 중진 당구인들과 함께 1985년 1월 대한댱구회를 만들게 된다. 대한당구회는 만점대회와 예술당구대회 등 사업들을 펼치며 한국당구의 새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프로선발전이란 타이틀로 선수도 선발해 ‘86스타’들을 만들어 내면서 프로단체로서 기능도 추진해 나갔다.
▶86 한국프로당구 김무순 챔피언에 등극
1, 2차로 나눠 치러진 선발전에서 박대용 김상윤 한익범 김평준 김영철 백정기 이흥식 엄동렬 엄철민 김무순 김정규 조성구 조창섭 김종석 김석윤 변경환 현택실 김철민 등이 선발되었다.
대한당구회는 첫 사업으로 서울 낙원동 허리우드 당구장에서 만점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3쿠션 대회는 챔피언을 만들어놓고 타이틀매치 형태로 기획해 1986년 문화체육관에서 첫 대회를 개최, 신예 김무순 선수가 부산의 김평준 선수를 이기고 챔피언이 되었다.
김무순 선수는 여의도 백화점에서 열린 2차 프로당구대회에서도 챔피언 타이틀을 지켜냈고, 사구에서는 박대용 선수가 김용석 선수를 꺾고 새로운 챔피언이 되었다. 3차 대회는 강남 뉴코아 백화점, 4차 대회는 대전에서 개최되었고, 르네쌍스 호텔에서 열린 5차 대회에서는 김정규 선수가 챔피언이 된다.
1986년 한국프로당구 초대 챔피언 김무순 선수.
▶한국당구 제1의 기획자 김문장 시대 열려
대한당구회에는 경기연맹 멤버, 소위 ‘반도맨’ 선수들인 박병문 김명석 이상천 장성출 이천우 변기선 등이 항의의 성격으로 합류하지 않아 반쪽 조직이 되는 듯 했다. 그러나 대한당구회가 활발한 사업추진으로 대세가 기울어지며 한국당구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된다.
대한당구회를 기획한 김문장 회장은 한국당구에서 첫손에 꼽히는 당구 기획자로, 그 후 50여 차례의 당구 사업들을 추진하며 누구도 따라 가지 못하는 기획력으로 한국당구 발전을 이끌었다.
1987년 1월 김문장 회장은 이항구 국장과 친분이 두터운 임영렬 회장을 앞세워 일간스포츠를 섭외해 ‘일간스포츠배 전국당구대회’를 유치한다. 이 대회에서는 마산 출신 김동수 선수가 우승을 차지하며 같은 해 UMB 주최 세계3쿠션 그랑프리 당구대회에 한국대표로 출전한다. 하지만 일본의 경기력에 밀려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은광교역 당구공 수입 독점하며 엄청난 이익 챙겨
한국에 당구공(벨기에공)은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는데 가격이 25만 원대에 달해 당구장 재산목록 1호였다. 이 무렵 당구장에서는 공을 도난당하는 일이 숱하게 일어났고, 이렇게 잃어버린 당구공은 중앙시장으로 유입되면서 중고 공을 사려면 중앙시장에 가서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주 벨기에 대사관 참사관이 장식용으로 당구공 한 벌을 들여오면서 한국시장에 당구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 이후 그는 직장까지 그만두면서 당구공 수입을 시작한다. 결국 장식용으로 구입한 당구공이 인연이 되어 ‘은광교역’이란 오퍼상을 차렸고 당구공을 전문적으로 수입해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
이 시기에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대한당구선수협회 박태호 이사가 은광교역을 찾아가 후원 제안을 했으나 거절당한 일이 있었다. 은광교역은 경기단체와 공조하지 않아도 당구공의 매출이 지속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후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박태호 이사는 당구공 수입을 다각적으로 알아보게 되고 결국 국제상사와 글로리 상사가 수입에 나서며 당구공 수입원이 3개사로 늘어난다. 이로써 은광교역의 독과점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박태호 당구연맹 수석 부회장> news@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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