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한국 당구 100년사에 가장 큰 화제가 된 ‘사건’은 고 이상천(1954~2004)의 3쿠션 세계 제패일 것이다. 이상천은 1994년 1월 벨기에 켄트에서 열린 월드컵 3쿠션 파이널 대회 결승에서 신예 프레드릭 쿠드롱을 15점 3선승제에서 3대1로 제압, 승점 90점을 획득하면서 총 220점으로 종합우승을 차지해 투어 상금 6만2천 달러를 거머쥐었다.
95서울컵국제당구대회에서 이상천(왼쪽) 선수와 일본 고모리 선수.
▶1993-1994 BWA 월드컵 당구대회 토털 챔피언으로 등극
월드컵 3쿠션 대회는 세계당구월드컵(BWA)주최로 해마다 5~7개국 투어 방식으로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 대회이다. 월드컵의 채점 방식은 대회마다 1등 60점, 2등 45점, 3등 30점 순으로 부여되며 가장 중요한 파이널 대회는 50% 가산점이 주어져 챔피언을 가린다.
이상천은 터키에서 1위, 네덜란드에서 3위, 일본에서 4위, 독일에서 6위를 각각 기록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16강에서 탈락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터키, 네덜란드, 이탈리아 3개 대회에서 우승한 블롬달(스웨덴)이 파이널 16강에서 탈락하는 이변을 틈타 우승을 차지하면서, 210점을 얻은 블롬달 보다 10점을 앞서 1993-1994 세계 3쿠션 챔피언이 된다.
▶‘상리의 세계챔프 등극’ 미국언론 대서특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3쿠션 머신’, ‘꿈의 승부사’ 등의 애칭을 가진 이상천의 세계 제패는 유럽 현지 신문의 1면 톱으로 크게 보도되었다. 동네 경기로 인식되었던 당구를 메이저 신문들이 1면 머리기사로 올렸다는 것 자체가 우승을 떠나 화제가 되었다.
해외에서 평가한 이상천의 뉴스 가치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1994년 1월 9일과 10일에 유럽의 30여 개 TV와 신문은 이상천을 ‘동양의 새 당구황제’로 소개했고, 열흘 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이상천의 우승 소식을 이례적으로 2개면에 걸쳐 보도했다.
한국인의 미국 이민 역사 100년 사상 최대 지면을 차지한 기사의 제목은 ‘챔피언 소리없이 개선하다(The Unsung Champ)’, ‘상리(이상천)가 미국당구 사상 처음으로 유럽을 이겼다’, ‘상리의 개선에 왜 축하퍼레이드조차 하지 않는가, 시장은 왜 맨발로 뛰어 나오지 않았는가’ 등이었다. 기사가 나간 이틀 뒤 실제로 이상천은 줄리아니 뉴욕 시장의 축하 겸 사과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이상천은 또 ‘데이비드 레터맨 쇼’ 등 TV 출연 요청이 이어지는 등 유명인사로 급부상하며 당구선수로서 최고의 순간을 맛보기도 했다.
이상천이 세계당구 최고의 테크니션이 되기까지는 밤낮없이 큐를 잡는 초인적인 노력이 뒤따랐다. 그의 말처럼 ‘노랑머리 장대 같은’ 세계 허슬러 스타 틈에서 뼈저리게 깨우친 것은 ‘패하면 죽는다’는 처절한 승부 근성이 바탕이 된 것이다.
▶80년대 한국당구의 독보적인 존재 이상천
한국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전국을 호령한 이상천이었지만 그도 생활고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내기당구를 쳐야 했고 노름에 손을 대면서 온갖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필자는 1985년 무교동에서 클럽을 운영하면서 이상천 선수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하는 기분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이상천 선수는 당구를 잘 치기도 했지만 훤칠한 키에 호남형 마스크로 호감 가는 스타일이었다. 게다가 말은 또 어찌나 잘 하던지.
이상천 선수가 찍어치기(마세)를 하고 있다.
필자가 운영하던 당구클럽에 이상천이 나타나면 ‘판(즉석)’이 자연스럽게 깨져 버렸다. 당구를 치던 선수들이 다들 갑자기 큐를 내려놓는 것이다. 시간이 없어서, 또는 갈 곳이 있다는 등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사실은 누구도 이상천과 당구를 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구는 치고 싶은데 나서는 사람이 없자 이상천은 말도 안 되는 핸디를 제안하는 등 자존심을 긁는 전략으로 상대에게 다가갔다.
▶갬블과 체육을 두루 경험한 이상천의 충고
이상천은 “대한민국에서 나, 이상천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는 도발적인 선언으로 국내 선수들을 자극했다. ‘자신만큼 연습을 많이 하는 선수는 없다’라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다소 ‘건방진’ 선언이긴 했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필자가 이상천을 만난 곳은 항상 당구장이었는데 그는 큐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고점자든 하점자든 상대를 가리지 않고 게임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상천은 당구선수로서 누구 못지않은 재능과 기질을 갖추고 있었다. 1971년 처음 큐를 잡은 지 5개월 만에 300점을 올렸으며 30대 중반, 나름의 절정기 때 전국의 고수들과 어려운 게임을 하면서 근성과 집중력을 키웠다. 상대가 나가떨어질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승부사 기질도 타고 났다.
이상천은 당시 전국을 주름잡던 한국당구의 전설 ‘이리꼬마’ 전광운을 꺾기 위해 이리(현 익산시)를 숱하게 찾아 승부를 펼쳤다. 하지만 결과는 7전7패의 대굴욕. 이정도면 웬만한 사람은 포기할 만도 했지만 이상천은 비상식적인 오기로 다시 도전해 결국 승리를 거머쥔다. 그렇게 갈망했던 한국당구의 전설을 꺾은 뒤 이상천은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이상천이 ‘이리꼬마’ 전광운을 꺾은 소식은 전국에 퍼졌고, 그렇게 이상천의 이름이 전국을 강타했다.
세계3쿠션 월드컵 당구대회 전경.
같은 경기라 해도 내기 당구와 정식 경기는 흐름이 판이하다. 내기 당구 시 살아남기 위한 온갖 방법들이 약간의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정식 경기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해주지는 못한다.
당구를 시작하면서 50대에 이르기까지 이상천의 큐 인생은 ‘꾼’에서 ‘선수’로 전환한 모범사례이다. 이상천은 "과거 풍운아들이 ‘진검 승부’로 날을 샜던 ‘꾼들의 황금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그렇다! 당구는 이제 대한체육회 정가맹 경기단체와 전국체전 정식 종목 등 스포츠로서 인정받고 있으며 중고연맹, 대학연맹, 실업 팀 창단 등 아마추어 종목으로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갬블인과 체육인을 두루 경험한 이상천 선수의 말처럼 당구인들은 이제 ‘체육인’으로서의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나서야 된다.
<박태호 당구연맹 수석 부회장> news@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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