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쿠션의 마술사’ 이상천은 한국 당구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그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좌절을 반복하면서 찬반양론의 쏟아지는 관심과 함께 뉴스를 몰고 다닌 스타였다.
▶호시탐탐 세계시장 진출 꿈꾼 이상천
1954년 1월15일 서울 원효로에서 태어난 이상천(미국명:상리)은 서울 토박이다. 당구의 매력에 빠져 하루도 큐를 잡지 않은 날이 없을 만큼 이상천은 당구에 미쳐 있었다.
1970년 대 후반, 기량이 크게 발전한 것을 스스로 느낀 이상천은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꼬마들’(각 지역의 유명한 선수들)과 실력을 겨루기 위해 투어에 나서 수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 비 정상적인 핸디로 게임을 즐겼고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갬블 정신’을 터득했다.
그렇게 이상천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량으로 한국 최고의 당구스타가 되었고 명성이 하늘을 찌르게 된다. 그러나 이상천은 국내에서 당구를 아무리 잘 쳐도 선수대접은 커녕 먹고 살기도 힘들다는 결론을 내리고 호시탐탐 세계시장 진출을 꿈꾸게 된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89년 프로 등용문 격인 ‘벨기에 스파그랑프리’에 출전해 15점을 단 큐에 쳐내며 경기를 지켜보던 벨기에 국왕으로부터 기립박수를 받는 등 국제무대에서의 스타 탄생을 예고했다.
워커힐호텔에서 개최된 1995서울컵국제당구대회에서 이상천 선수.
▶실력을 인정받은 이상천 BWA 고정멤버로 합류
스파그랑프리를 끝내고 고심 끝에 이상천은 미국행을 결심한다. 맨손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이상천이 잘할 수 있는 건 오직 당구뿐이었고, 그래서 당구에 인생을 걸 수밖에 없었다. 고수들을 찾아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이름을 알려 나갔고 마침내 미국에서도 이상천을 꺾을 사람이 없게 되었다.
미국 대륙의 1인자가 된 이상천은 세계유명선수들의 관심 대상 1호의 인지도를 굳히며 그들과 대결도 이어나갔다. 레이몽드 클루망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400점 치기’ 경기를 치르면서 클루망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고, 브롬달 등에게도 도전하며 유럽에까지 그의 이름을 알렸다.
부인 권경순 여사의 헌신적인 내조와 탁월한 로비도 이상천의 주가 급상승에 한 몫 했다. 또 레이몽드 클루망은 이상천의 경기력에 감탄해 BWA(세계프로당구협회)회장인 닥터 바이어에게 그를 BWA 멤버로 강력하게 추천하는 등 이상천은 빅 빌러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2002부산아시안게임에서 이상천, 황득희, 일본의 시마다 선수(왼쪽부터).
▶이상천 1993-1994세계월드컵3쿠션 당구대회 토털 챔피언 등극
BWA(세계프로당구협회)멤버로 활동하던 이상천은 연간 개최되는 5∼7차례 대회에서 토털 랭킹 상위권으로 활동했고 레이몽드 클루망(벨기에), 토브욘 브롬달(스웨덴)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 틈에서 조금도 기죽지 않고 착실하게 성적을 올렸다.
이상천의 근성과 집중력은 대한민국 어느 선수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1980년대 내기 당구가 한창일 때 이상천의 근성은 상상을 초월했다. 손에 초크 가루가 범벅이 될 정도로 집중한 채 밤을 새워 당구를 쳤고 매시간 세수를 해가며 정신력을 가다듬었다.
이런 이상천 특유의 근성과 배짱, 그리고 강한 의지력이 바탕이 되어 드디어 그는 1994년 1월10일 ‘일’을 낸 것이다. 필자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한국시간 오전 6시 벨기에의 이상천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박 이사님 여기 벨기에입니다 제가 우승했습니다”. 단잠에서 깨 전화를 받은 필자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단일 대회나 그랑프리 대회의 우승도 하늘의 별 따기인데 세계 각국을 돌며 치르는 6차례 투어 대회의 토털 우승은 어떤 스포츠 종목의 세계 제패보다 몇 배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당구장을 불량의 온상으로 여겼던 60~70년대 이후의 분위기를 바꾸려고 무던히 애써온 당구인들에게 이상천의 우승은 한국당구의 우승이었으며 스포츠 당구를 냉대해온 사회인식에 대한 승리였던 것이다.
▶한국당구의 영웅 이상천 50세 짧은 삶 마감
당시 홍보이사였던 필자는 이 소식을 전국 구석구석에 알리고 싶었다. 지금과 달리 온라인 시스템이 없었던 시절 전화와 팩스, 그리고 발로 뛰면서 홍보에 온힘을 쏟았다. 보도자료를 직접 만들고 이상천의 비디오를 찾아 방송국과 신문사를 쫓아다녔다.
벨기에 파이널 대회 9일 전 일간스포츠 임용진, 스포츠서울 김세훈, 스포츠조선 조경재, 중앙일보 하지윤 기자와 식사를 하면서 7일부터 열리는 벨기에 월드컵 결승전에서 이상천이 만약 4강권에 들면 크게 보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그 ‘만약’이 4강을 넘어 우승까지 거머쥐자 각 신문 1면에 크게 실렸고 방송에도 관련 뉴스가 이어지는 등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동안 당구 이미지 쇄신과 홍보를 위해 수많은 사업들을 펼쳤지만 이상천의 세계제패는 그 몇 배의 가치가 있는 빅뉴스였다.
1995서울컵국제당구대회에서 이상천 선수.
첫머리에서도 밝혔지만 이상천의 사고방식과 도덕성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엇갈리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이상천의 사고방식이 그를 세계챔피언에 오르게 하고 한국당구의 독보적인 존재, 한국 당구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한 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당구 실력의 이상천. 그러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불행이 닥친다. 암에 걸린 것이다. 당구계는 이상천이 특유의 근성과 의지력, 그리고 갬블 정신으로 하루빨리 병을 떨쳐내고 다시 일어서길 바랐지만, 기대와 달리 그는 50세의 너무나 이른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한국 당구의 발전에 이상천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존재였다. 당구인들은 그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박태호 당구연맹 수석 부회장> news@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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