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1988년 3월 대한당구협회 제18대 임영렬 회장이 취임한다. 임 회장은 경기인 출신으로, 1965년 전국당구선수권대회 500점조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 양귀문, 김문장, 박병문, 신항균, 김석구 등 한국 당구의 중심인물들과는 명동에서 당구를 치면서 교우관계를 맺었다. 임 회장은 이북이 고향으로 1.4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와 동대문에 터전을 잡고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듬직한 풍채로 일거수일투족이 상대를 압도하기에 충분했고, 또 작은 선물과 함께 진정성 있게 다가가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한국 당구 최고의 로비스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주위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식인들이 많았다. 특히 연세대 출신 체육인들이 많았다.


임영렬 회장 UMB세계당구대회에 한국선수 ‘직접 출전’ 계기 만들어


당시 대한당구협회의 운용을 위해서는 경기인 출신들이 꼭 필요했다. 그래서 김문장 양귀문 등은 임영렬 회장을 대한당구협회 회장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1985년부터 대한당구협회 종로지부를 맡고 있던 임 회장은 이들의 도움으로 제18대 대한당구협회 회장에 당선된다.


스포츠당구협회 임영렬 초대 회장.


취임 후 임 회장은 에콰도르에서 열린 UMB총회에 홀로 참석해 세계당구선수권대회 출전을 위해 아시아에 배정된 티켓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를 한다. 일본선수 8명과 한국선수 1명이 리그전으로 출전 선수를 선발하는 부당함을 지적한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UMB가 주최하는 세계선수권대회에 한국선수가 직접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임 회장은 에콰도르에서 돌아온 뒤에는 제 18회 전국당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는 등 경기인들을 위한 많은 업적을 남기고 임기를 마치게 된다.


일본 체육, 유럽 흉내 내다 한국과 중국에 밀려


일본 체육의 출발은 엘리트 체육이었다. 2차 대전에서 패전국이 된 일본은 이후 재건과정에서 경제성장과 함께 체육도 빠르게 성장한다. 올림픽에서는 아시아권을 대표하며 상위권 성적을 거두고 있었고 아시안게임에서는 항상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입장에서는 부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경기력의 차이는 쉽게 극복하기 어려웠다.


일본 체육은 사회체육과 엘리트체육의 두 바퀴로 움직이며 정부의 지원 아래 우수한 선수들이 사회체육을 통해 발굴되었고 이들이 엘리트 선수로 성장하면서 세계 체육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1983년 기존의 체육 발전 틀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미국과 유럽 등은 학교체육과 클럽체육 만으로도 올림픽이나 각종 세계대회에서 지속적으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데 굳이 일본만 엘리트 체육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체육인들의 주장이었다. 그들의 주장이 공감을 얻으며 일본 체육은 엘리트 체육에서 사회 체육 중심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게 된다.


사회 체육에 초점을 둔 체육 정책이 선진국형이라고 판단한 일본과 달리 당시 한국 체육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한체육회 예산을 크게 늘리는 등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전두환은 스포츠광으로, 태릉선수촌을 수시로 방문해 국가대표 선수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프로축구와 프로야구도 출범하는 등 이 시기에 한국체육은 한 단계 발전하게 된다.


한국과 정반대로 움직인 체육 정책의 결과로 일본은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한국에 참패를 당한다. 88서울올림픽에서도 적수가 되지 못했다. 두 국제대회의 성적에 크게 자존심이 상한 일본 극우층은 이후 엘리트 체육의 부활을 요구하게 된다.


2010년 수원세계3쿠션당구월드컵에서 이유병 대한당구연맹 전 회장, 박용성 대한체육회 전 회장, 김용서 전 수원 시장, 장 클로드 듀퐁 UMB 전 회장, 바르키 UMB 현 회장, 그리고 니시오 일본당구협회 회장(왼쪽부터)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72년부터 시작된 한일친선당구대회 한국당구발전에 크게 기여


한일 체육의 뒤바뀐 흐름처럼 당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구는 일본을 통해 국내에 들어왔다. 당시 일본은 세계적인 선수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을 만큼 뛰어난 경기력을 자랑했다. 고바야시와 고모리 등이 세계당구대회에서 우승하며 경기력에서는 우리가 넘볼 수 없는 절대적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1970년대 한국 당구는 재일동포 윤춘식에게서 일본당구를 접하게 된다. 그는 수시로 한국을 찾아 전반적인 당구 정보를 제공하고 일본선수들을 한국에 데려와 경기를 펼치는 등 한국당구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손재주와 눈썰미가 좋았던 한국선수들은 그의 도움으로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어 어느덧 일본과도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


1972년부터 시작해 10년동안 해마다 열린 한일친선당구대회를 통해 한국 당구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게 된다. 한일친선당구대회는 당구장을 경영하는 업주모임인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가 주최했고 선수국에 포진한 경기인 출신들이 주관했다. 양기문, 박병문, 고창환, 전광웅, 한상화, 김용인, 정상철, 김용필 등이 이 대회를 통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전국의 수많은 선수들도 출전을 위해 노력하면서 자연스럽게 경기력도 향상되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진행된 한일친선당구대회는 한국에서는 주로 서울에서, 일본에서는 도쿄에서 개최됐으며, 1981년 태평양당구장에서 박병문 선수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막을 내린다.


신예 이홍기 1995년 한일당구최강전 고바야시 꺾고 우승


대한당구선수협회 김문장 회장은 1995년 한일당구최강전을 기획하며 한국당구의 실력 검증에 나섰다.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16명의 대표선수들이 출전해 서울 삼풍백화점에서 개최된 대회에서 이홍기 선수가 고바야시 등 일본 선수들을 한명씩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지켜보던 일본당구협회 고바야시 전무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이 무렵부터 한국 당구는 일본과 대등한 경기력을 보이기 시작했고 일본 당구는 침체기에 접어든다. 자신감을 얻은 한국은 이후에도 당구 열기가 식지 않아 당구장이 전국에 걸쳐 3만여 개로 늘어나는 등 호황을 누리게 된다. 또 뛰어난 실력을 갖춘 신인 선수들이 잇달아 등장하며 이후 세계 최고의 선수층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선수 양산에 실패한 일본은 선수층의 노령화로 경기력이 한국에 크게 뒤처지며 추락하고 만다. 현재의 분위기로 보아 이런 흐름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당구 행정인들은 한국 당구가 나아갈 길을 정확히 보고 있었다. 당구장에 드나드는 동호인들을 대회로 이끌었고 이 자원을 한국 당구의 중심선수들로 활동하게 만들었다. 또 클럽당구 활성화를 목표로 개인 큐 갖기 운동과 유니폼 문화도 만들어 나갔다.


대한당구연맹이 방송과 연계한 사업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생활체육은 풀뿌리 당구사업을 펼치며 전국에서 수많은 대회를 개최하는 등 그야말로 한국을 ‘당구천국’으로 만들어냈다.


왼쪽부터 1995년 한일당구최강전 때 일본의 고바야시 선수와 챔피언 이홍기 선수, 그리고 대한당구선수협회 김문장 회장의 모습.


한국 당구의 미래 희망적이다


대한당구연맹과 생활체육 당구연합회가 전국에서 벌인 각종 사업에 힘입어 최근 은퇴한 베이비붐 세대가 다시 큐대를 잡는 등 당구장이 북적이고 있다. 금연 문화가 확산되면서 당구장의 환경도 크게 개선됐다. 이로 인해 남성 중심의 놀이문화로 여겨졌던 당구가 이제 가족 모두가 즐기는 종목이 됐고 당구장을 찾는 여성들도 꾸준히 늘고 있다. 여기에 학교체육으로 활성화 시키기 위한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한국당구의 미래는 분명히 희망적이다.


<박태호 당구연맹 수석 부회장> news@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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