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1994년 10월 제2회 제주도지사배 전국당구대회가 제주 도민체육관에서 열렸다. 선수 부분은 사구와 예술구로, 동호인은 사구와 3쿠션으로 진행됐다. 사구는 예선을 거쳐 본선에 진출하는 경기 방식이었고 예술구는 예선 없이 제주도 본선 직행이었다.
이 대회에서 예술구는 김철민이 우승을, 김석윤이 준우승을 차지했다. 관심이 집중된 종목은 사구였다. 경기도 소속의 남도열이 결승전에서 단 큐에 1만점을 치는 진기록을 달성한 것이다.
▶남도열 단 큐에 1만 점 ‘세계기록’
개막식 전에 시작된 사구 결승은 남도열의 경기를 일시 중단 시키고 행사를 치러야 했다. 개막식 뒤 재개된 경기에서 결국 남도열은 한 이닝에 1만 점을 득점하면서 우승하게 된다.
단 큐 1만 점은 세계기록이다. 일본의 가츠라와 다카기가 기록한 적이 있지만 일본의 사구 경기는 우리와 다르다. 우리나라 사구는 적색 공만 맞히는 경기 방식이고 일본은 수구로 나머지 3개의 공 중 아무거나 맞히면 1점이 되는 경기 방식이다.
1995년 3쿠션대제전에서 남도열.
▶스포츠서울 김세훈 기자 1만 점 단 큐 기록 단독보도
당시 홍보이사였던 필자는 스포츠서울 김세훈 기자에게 이 사실을 알려 지면에 실리기도 했다.
남도열은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선수들의 기량을 평가할 수 없었던 무렵 한국당구의 절대고수였다. 3쿠션, 예술구, 사구 등 모두 능한 전천후로, 남도열의 이름을 잘 알지 못했던 일부 동호인들은 그를 ‘가냘픈 체구에 까무잡잡하게 생긴 사람’으로 설명하며 기량을 평가하곤 했다.
1978년 필자도 금호동 왕당구장에서 남도열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경기력을 잘 알지 못하고 달려들었다가 혼이 난 기억이 있다.
당시 서재장, 정철수, 김영화와 필자가 즉석을 치고 있었다. 한참을 지켜보던 남도열이 같이 쳐도 되냐고 물었다. 그를 우습게 보고 그러자고 했다가 우리 네 사람은 꼼짝 못하고 패하고 만다.
그 후 교남동에서 열린 한일당구대회에서 심판을 보고 있는 남도열과 다시 마주친 뒤에야 그가 전국구 갬블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경북 포항이 고향인 남도열은 그동안 수많은 대회에서 입상과 우승을 하며 전국적인 선수로 명성을 이어왔다. 특히 경기도 연맹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며 후배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에 관심을 가져 그를 따르는 선수들이 많았다.
남도열은 이후 생활체육전국당구연합회가 조직되면서 임영렬 회장과 인연을 맺으며 부회장으로 많은 활약을 펼친다. 지금은 포천 송우리에서 클럽을 운영하며 대한당구연맹 자문위원과 대한당구원로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포켓당구 독자 연맹체 조직 가동
1994년 12월 대한당구선수협회 산하 포켓당구위원회로 운영돼 오던 포켓 종목이 별도의 연맹체를 조직한다. 당시 한국 당구의 주류는 3쿠션으로, 당구정책도 포켓 종목보다는 시장이 컸던 3쿠션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세계적 흐름은 포켓 당구로 넘어가고 있었지만 국내 당구는 여전히 3쿠션에 올인하고 있었다.
국제적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 하는 당구 정책에 포켓을 치는 선수들은 집행부에 서운함을 드러냈지만 대한당구선수협회는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고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김영재, 백상영, 박병수, 박신영, 이장수 등 포켓당구의 중심인물들이 반기를 들고 포켓당구를 연맹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며 집행부를 구성한다.
1993년 포켓그랑프리 전주대회 기념촬영.
▶한국포켓당구연맹 천남중 초대 회장 무성의에 포켓선수들 실망
이들은 신촌 자신의 건물에 포켓 전용구장을 경영하고 있던 천남중 씨를 대한포켓당구연맹 초대 회장으로 추대한다. 당시 박신영이 클럽 매니저로 활동했다. 그런데 천남중 회장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뚜렷한 사업 한번 해보지 않고 사퇴를 선언하며 포켓당구 선수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겼다. 맹목적인 회장영입이 낳은 결과였다. 본인 소유의 건물이 있어서 재력가로, 또 포켓 전용 당구장을 운영하고 있어서 포켓당구에 열정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잘못된 선택이었다.
포켓 당구인들의 기대 속에 출범한 한국포켓당구연맹은 천남중 초대 회장이 포켓당구에 관심과 책임감을 보여주지 않으며 사퇴하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자 다시 수습에 나선다.
박병수 전 전무이사
▶대한포켓당구연맹 회장으로 박정훈 국회의원 영입
대한포켓당구연맹은 천남중 회장의 사퇴 뒤 1996년 1월 정기총회에서 박정훈 국회의원을 회장으로 영입하고 김영재 씨를 명예회장으로, 박병수 씨를 전무이사로 선임하고 활동에 들어간다. 정치인의 당구단체 회장 취임은 처음이라 많은 당구인들의 기대와 함께 대한포켓당구연맹은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김영재 회장이 APBU(아시아 포켓당구연맹)부회장으로 당선된 뒤부터 포켓 선수들이 국제대회로 눈을 돌려 한국이 아시아 포켓 강국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박신영, 정영화, 이장수, 김가영 등이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성적을 올리고 있었다.
대만의 투영휘 아시아포켓당구연맹회장은 한국의 포켓 발전에 크게 고무되었다. 특히 경기력이 앞서 있던 대만에 한국선수들의 유학이 이어지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덕분에 한국포켓당구의 경기력도 크게 향상하게 된다.
1995년 7월 대한포켓당구연맹은 맥주회사인 CASS를 타이틀 스폰서로 ‘신세대여성포켓볼대회’를 개최한다. 박병수 전무이사는 포켓당구 협찬사를 당구 용품에서 일반 기업으로 옮기는 노력을 기울여 하나씩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제 1회 CASS배 신세대여성포켓볼대회 개인전은 이마리가, 복식에서는 홍지혜, 김혜안이 우승을 한다.
▶한국최대 포켓당구대회 KENT배 열려
1995년 8월에는 포켓당구사상 최대의 전국당구대회가 88체육관에서 열린다. '95켄트배 전국포켓볼당구대회'는 지금까지의 당구대회 틀을 벗어난 획기적인 대회였다. 적막한 분위기의 경기장에 중간 중간 공연이 펼쳐지는 초유의 기획이었다. 그전과는 전혀 다른 콘셉트로 당구대회의 새로운 문화를 조성하는 듯 했다. 모두가 놀랐다. 하지만 담배 회사가 타이틀 스폰서였던 이 대회는 이후 이어지지 못 했다. 켄트배 전국포켓볼 당구대회에서는 이장수 선수가 우승을, 박신영 선수가 준우승을 하였다.
포켓당구 활성화를 위한 포켓당구인들의 노력은 거의 몸부림에 가까웠다. 그들에겐 세계적인 흐름과 동떨어진 한국당구가 항시 불만이었고 답답했다. 세계 각국에서 포켓 중심의 사업들이 이어지고 시장 역시 포켓이 중심인데 한국에서만 케롬 당구의 확장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계적인 경기력의 소유자들이 아시아에 포진돼 있고 대만과 필리핀, 그리고 중국이 포켓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도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게 포켓을 치는 경기인들의 한결같은 주장이었다.
1993년 대전그랑프리 포켓당구대회 전경.
<박태호 당구연맹 수석 부회장> news@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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