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의 천재가 신세계를 연다. 0.9%의 비범한 사람이 통찰력을 가지고 그 길을 쫓아간다. 나머지 99%는 평범한 우리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특별함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W’라고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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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가교의 박종상 대표. 자신이 출연한 연극 퍼즈(PAUSE)의 포스트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스포츠서울 배우근기자]“누추하죠. 연극판이 다 이렇습니다”

극단 ‘가교’ 박종상(61) 대표의 안내로 들어선 지하 연습실은 여러 소품으로 어지러웠다. 무엇보다 지하라서 그런지 약간 퀴퀴한 냄새가 먼저 사람을 반긴다. 그러나 20평 남짓한 이곳은 공연을 준비하는 이들에겐 천국과 같은 곳이다. 박 대표는 연습실을 구하지 못한 배우들에게 이곳을 개방하고 있다.

“나도 이제 환갑이 지났어요. 그동안 연극을 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데 후배들에겐 뭘 했을까, 생각해보니 해준 게 별로 없어요. ‘내 생각만 했구나’ 반성했어요. 노력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연습실을 제공하기 시작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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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표가 운영하는 지하 연습실

박 대표는 지난 2017년 삼풍백화점의 비극을 다룬 2인극을 하다 몸에 심각한 이상을 느껴 병원을 찾았다. 동네 병원에서는 소견서를 써 주며 가까운 서울대병원에 빨리 가보라고 했다. 심장판막 이상이었다. 서울대병원 흉부외과에선 검진 후 바로 수술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박 대표는 곧바로 수술대에 누웠다. 주먹 크기의 심장이 여섯 배나 커져 있었다.

“하루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 했어요. 수술을 하고 나선 세상이 다르게 보였어요. 지금까지 연극만 고집했는데 즐기지 못하고 매달리기만 했어요. 여유가 없었던 거죠. 다 풀어놓기로 했어요. 공연하고 싶은데 연습장소가 없는 이들에게 연습실도 풀어줬어요.”

그 결정에 대해 박 대표는 내세울게 아니라고 손사래 쳤다. 오히려 지난 2011년 계약할 때부터 지금까지 임대료를 한 푼도 올리지 않은 건물주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또한 심장수술로 인한 사고의 변화도 있지만, 극단에서 배운 대로 실천하는 것뿐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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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실 벽에 걸려있는 오래된 사진. 1994년 극단 가교에서 공연한 ‘번지없는 주막’의 출연진 사진이다. 왼쪽부터 윤문식, 김진태, 김성녀, 최주봉, 박승태, 박인환, 양재성, 오지혜, 최연식. 이들은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다.

극단 가교는 1965년 동인제로 만들어진 연극 단체로 50년 이상 활동 중인 한국의 대표적인 극단 가운데 하나다. 박 대표는 대학 졸업 후 1980년에 입단해 지금까지 가교를 지키고 있는 산증인이다.

연극인의 삶은 치열하다. 현실은 고달플 수 있어도 무대 위 인생은 치열할수록 뜨겁다. 1995년에 올린 가교 30주년 기념공연에서 배우 박종상은 주인공으로 무대에 올랐다. 당시 몸무게가 43kg까지 빠졌다.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2011년부터는 폐업 직전까지 간 극단 가교를 맡아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태어나도 연극인으로 살겠다고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평생의 직업이 되었어요. 다른 자리에 가서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연극 작업만 했어요. 이 속에서 어떡하든 생활해야 합니다. 그래도 가장 큰 이유는 즐거움이죠. 연극을 해야 즐겁습니다. 힘들어도 다시 배우의 기회가 온다면 잡을 거예요. 배우는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는 게 가장 즐겁잖아요. 연극에서 많은 걸 배웠고 얻었어요. 작품 속에서 여러 인생을 만나다 보니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알게 됐죠. 연극은 나의 스승입니다. 모든 것을 얻었어요. 모든 것의 스승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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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무대에 오른 연극인의 W는 무엇일까.

“연극을 해서 그런지, 나는 모든 사람이 특별하다고 봐요.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달라요. 나름대로 개성이 있어요. 또한 가족 사이에선 누구나 특별하잖아요. 그런데 바깥세상에선 일률적으로 측정되고 결과로 판정받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 사람 자체가 묵살되고 낮춰진다고 봐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 사람 나름대로 특별함이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렸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 노력하죠. 부모도 자식에게 그걸 강요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릴 때부터 자신의 특별함을 찾지 못하는 거 같아요. 우리 부모들은 더 힘들게 생존한 세대라 자신이 특별한 걸 모르고 살았어요. 결과적으로 자신의 아이에게도 경쟁에서 이길 것을 주문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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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웃음을 잃지 않는 박종상 대표.

박 대표는 자신이 생각하는 W를 설명하기 위해 공연 하나를 예로 들었다. 특별한 관객을 대상으로 한 특별한 무대였다.

“나는 장애자, 그런 분들도 특별하다고 봐요. 전에 시각장애인을 위해 공연한 적이 있는데요. 그들은 눈으로 보지 못하니까 귀로만 들었어요. 그런데 우리를 보며 웃고 우는 거예요. 많이 놀랐죠. 우리 중엔 보고 듣는데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는데, 그들은 보이지 않는데도 배우들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어요. 눈이 보이고 귀가 들리는 우린 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사실 모두가 특별해요. 가끔 어떤 이를 지목하며 ‘쟤는 특별해!’ 라고 말하는데 사실 너도, 나도 우리는 모두 특별합니다. 평범하다고 하지만 개인별로 따져보면 누구나 특별한 게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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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실 한 켠에서

박 대표는 자신의 W에 대해서는 잠시 고민한 뒤 이렇게 말했다.

“남이 아픈 걸 못 봐요. 힘들어하는 걸 못 봐요. 천성인 거 같아요. 바보 같다는 말도 듣습니다. 아픈 이를 보면 도와주려 하는데, 그게 안 되면 한동안 멈춰서 바라만 보고, 못 도와주니 상처로 돌아와요.”“그래도 지금은 어떻게 하면 도움을 줄지 고민하는데, 이전에는 그 고민조차 못했습니다. 지금처럼 고민할 수 있는 여력이라도 있는 게 행복해요. 내가 아무 것도 없어 손조차 못 내미는 것과 어떻게 해줘야 할까 고민하는 건 차이가 있죠. 그렇게 바뀌어졌다는 게 나의 변화라면 변화예요.”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도 타인의 아픔을 보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그 아픔을 함께 느끼는 사람이 있다. 박 대표는 무대에선 여전히 열정을 불사르고 있고 현실에선 도움의 손길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스스로 넉넉하지 않지만,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W는 다름아닌 ‘마음’ 그 자체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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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배우, 연출, 각본까지 망라하는 박 대표는 심장 수술 후 1년에 서너편씩 더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오는 19일부터는 서울 성북동 여행자극장에서 열흘간 2인극 ‘사랑입니까’에 배우로 출연한다.

kenny@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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