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옥 감독
오성옥 여자 핸드볼청소년대표팀 감독(가운데). 제공 | 대한핸드볼협회

‘리와人드’는 되감는다는 영어 단어 ‘리와인드(rewind)’와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을 결합한 것으로서,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편집자주>

[스포츠서울 이용수기자]스포츠에서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갈고 닦은 사람을 ‘레전드’라고 부른다. 현재 한국 여자 핸드볼청소년대표팀을 이끄는 오성옥(46) 감독은 우리 나이로 마흔 살까지 현역을 유지하며 한국 핸드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 2008 베이징 대회까지 모두 출전한 그는 2000 시드니 대회를 제외하고 모두 단상 위에 올라 메달(금1·은2·동1)을 목에 걸었다.

이른 나이에 결혼해 한 번 은퇴했던 오성옥은 다시 코트로 돌아와 선수생활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한국 핸드볼을 대표했다. 과거였다면 은퇴하고도 남았을 나이에도 꾸준한 경기력을 유지하며 유럽 무대를 휘저었다. 은퇴 무렵에는 팀의 지휘봉을 잡으면서도 코트 위를 누볐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던 그의 이야기는 대한민국 국민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지금은 지도자로서 한국 여자 핸드볼의 백년대계인 청소년대표팀을 지도하며 ‘레전드’로서 그의 네버엔딩 스토리를 이어가고 있다. 그의 길고 감동 가득한 핸드볼 이야기는 숨죽이고 귀를 기울이게 했다.

오성옥 감독
오성옥 여자 핸드볼청소년대표팀 감독(가운데). 제공 | 대한핸드볼협회

◇엄마의 마음으로 한국 핸드볼 미래 준비하는 오성옥 감독

오성옥 감독은 지난 3년여 시간 동안 한국 여자 핸드볼청소년대표팀을 지도하며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가 첫 사령탑을 잡은 지난 2016년 대표팀은 ‘제6회 세계여자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3위를 기록했고 이듬해 아시아 대회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지난 8월에는 2회 연속 세계 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3위에 올랐다.

“해외에 있다가 국내에 들어와서 첫 전임지도자를 맡고 세계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니 뿌듯하다. 우리 때는 청소년 대표가 없어 세계대회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보람을 느낀다. 항상 성인 무대만 생각했는데 어린 선수 육성에도 생각이 열렸다. 그래서 새로운 훈련법, 전술 등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려다 보니 즐겁다. 사실 귀국할 때만 해도 전임 지도자를 맡을 거라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협회에서 좋은 기회를 줘서 지도자로서 하나하나 배우고 있다.”

지난 2004년 오스트리아 히포방크로 이적한 뒤 유럽 무대를 누볐던 오성옥은 선수 겸 코치로도 활약하며 유럽의 지도 체계를 몸으로 체험하고 머릿속에도 담았다. 처음 유럽 땅을 밟을 때까지만 해도 유럽 선수들은 체계적인 훈련 없이 개인적인 신체 기량만으로 운동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피부로 느낀 유럽 무대는 달랐다.

“유럽 핸드볼을 체험하니 내가 생각하던 것과 달라 놀랐다. 개인 기량 위주로 할 줄 알았지만 팀플레이 위주로 하더라. 우리나라처럼 섬세하게는 못하더라도 짜임새 있는 핸드볼을 하더라. 유럽이 패턴 플레이를 한다는 게 신기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계획된대로 경기를 하더라.”

오 감독이 현재 가르치는 제자들은 1997년생인 아들 또래다. 그는 엄마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지도하며 훈련할 땐 독하게 가르치고 휴식 때는 편한 엄마처럼 다가가고 있다. 실력 면에서 세계 수준에 뒤처지지 않는 사실에 흐뭇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특히 오스트리아와 일본에서 성인팀을 지도했던 오 감독은 일본 성인보다 우리나라 선수들의 이해력이 빠르다고 전했다.

“일본에서 가르칠 땐 선수들의 이해력이 떨어져 답답했다. 기본기도 부족해 눈높이를 맞춰 훈련법을 만들었다. 5년간 많은 고민을 하며 혼자 지도법을 연구했다. 일본 선수들을 보다가 지금의 스펀지처럼 쑥쑥 빨아들이는 제자들을 보니 더 신나서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한 단계 더 끌어올려 가르치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오성옥
2004 아테네올림픽 당시 여자 핸드볼선수 오성옥이 아들에게 메달을 걸어주고 환하게 웃고 있다.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선수이전에 어머니였던 오성옥 “방황하던 아들도 이제는 내 사랑 알아줘”

오성옥 감독은 두 번 은퇴했다. 첫 번째 은퇴는 결혼하면서 코트 위를 떠났던 1997년 초였다. 그의 나이는 25세에 불과했다. 그래서인지 오 감독은 결혼 후 임신을 한 뒤에도 다시 코트 위에 서고 싶은 갈망을 느꼈다. 그 마음을 이해한 남편은 오 감독의 선수 복귀를 흔쾌히 허락했고 당시 일본 실업팀 히로시마 이즈미(현 히로시마 메이플레즈)에서 플레잉 감독으로 활약했던 임오경 감독 밑에서 복귀를 준비했다.

“1년간 운동을 쉬면서 출산까지 하니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더라. 그래서 한 달 만에 계약금도 돌려주며 포기하겠다고 했다. 그때 임 감독님이 ‘애 낳고 1년 쉬었는데 쉽게 만들어지냐. 천천히 한 번 다시 해보자’고 조언해주셨다. 운동화 끈을 다시 묶고 몸을 만들었다. 그날부터 틈나는 대로 윗몸일으키기 200~300개씩 하니 몸이 아픈 건 없어졌다. 복귀 두 달 뒤에는 경기에도 나섰다. 그리곤 그해 98~99시즌 팀 우승과 MVP까지 거머쥐며 완전히 복귀했다”

말로는 쉽지만 피나는 노력으로 일궈낸 복귀였다. 그렇게 그는 3번의 올림픽에 더 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선수이기 앞서 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였다. 일본과 오스트리아에서 생활한 어머니를 따라 해외에서 성장기를 보낸 오 감독의 아들은 쉽지 않은 사춘기를 보냈다.

“지금은 아들이 국내 유수의 대학에도 들어가고 군대도 카투사로 복무하는 등 만족스런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아들이 어릴 때 한국과 유럽, 일본을 오가니깐 혼란스러워했다. 영어, 독일어, 일본어, 우리말 등을 모두 쓰니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했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반항할 때는 ‘엄마가 날 이렇게 만들지 않았느냐’고 말하더라. 나는 아들에게 쉽지 않은 기회를 마음껏 누리게 해주고 싶었을 뿐인데, 아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니 눈물이 나더라. 아들을 위해 모든 걸 접고 귀국하는 것도 고려했다. 그러다 자립심을 키워주기 위해 고등학교를 뉴질랜드 기숙학교로 보냈다. 처음에는 힘들다고 전화했지만 이내 잘 적응하고 좋은 친구들 만나 공부도 열심히 하더라. 지금은 그 경험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해하며 내게 고맙다고 한다.”

오성옥
현역 시절 오성옥 감독(가운데). 스포츠서울 DB

◇임영철 감독의 노력 없었더라면 베이징의 ‘우생순’ 없었다

영화 ‘우생순’은 개봉 당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겼고 대중에 한국 핸드볼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됐다.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명승부를 펼친 여자 핸드볼대표팀의 이야기를 담은 ‘우생순’은 2008년 1월 개봉해 크게 주목받았다. 자연스럽게 같은해 8월 베이징 올림픽을 뛰는 핸드볼 대표팀에 국민적인 관심이 쏠렸다. 주인공 문소리가 연기한 실제 인물인 오성옥 감독이 직접 뛰는 경기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생순’은 재미를 위해 나와 남편의 이야기를 너무 각색한 게 많았다. 남편이 너무 안 좋게 그려졌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은 화가 많이 난 상황이었다. 사람들이 실화라고 믿으니깐 시댁에 미안하더라. 그래도 각오하고 한국 핸드볼 발전을 위해 내 이야기를 담아도 좋다고 허락했다”

영화를 통해 많은 관심이 쏠렸지만 사실 오 감독은 당시 베이징 대회를 뛸 생각이 없었다. 이미 올림픽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목에 건 오 감독 입장에서 동기를 부여하기는 힘들었다. 이런 오 감독의 마음을 움직인 건 은사 임영철 감독이었다.

“2004 아테네 대회 이후 대표팀 복귀 제의가 와도 사양했다. 그런데 임 감독님이 오스트리아로 직접 날아와 함께 베이징에 가자고 제안했다. 또 나보다 남편에게 먼저 허락을 받더라. 내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마음으로 보여준 임 감독님을 보고 감동해 베이징에 출전한 것이다. 주위에서는 5회 연속 올림픽 출전이라며 의미를 부여했으나 모든 걸 다 이룬 상황이었기에 내겐 의미 없었다. 오롯이 임 감독님의 간절함이 와닿아 내 마음을 움직였다.”

오성옥
지난 2007년 8월 태릉선수촌에서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를 마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스포츠서울 DB

◇40세 오성옥, 더 뛸 수 있었지만 후배 위해 은퇴 선택

오성옥 감독은 마흔 살까지 선수 생활을 계속했다. 오스트리아에선 플레잉코치를 일본에서는 플레잉감독을 맡으며 코트 위를 누볐다. 은퇴 때까지 변함없는 실력을 보여준 오 감독은 지난 2011년 일본 실업팀 히로시마 메이플 레즈에서 장고의 시간을 정리하고 결정했다. 부상 한 번 당한 적 없는 그는 경기력에도 크게 문제없었지만 선수 은퇴를 결정했다. 이는 모두 후배를 위한 선택이었다.

“팀에서는 외국인 둘이 뛰지 못했다. 우리 팀에는 나와 한국 후배 둘이 외국인으로 뛰고 있었다. 그래서 번갈아 가며 경기에 나섰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변화가 필요했다. 구단에서는 계약 기간이 끝난 후배를 한국에 돌려보내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내가 은퇴하고 후배를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만들겠다고 구단과 약속했다. 결국 내 선택이 맞았다. 잠재력 있는 후배에게 더 집중하니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오성옥 감독
오성옥 여자 핸드볼청소년대표팀 감독(가운데). 제공 | 대한핸드볼협회

◇공부하는 오성옥 감독, 제자들과 함께 나갈 올림픽을 꿈꾼다

현역 시절 헌신을 통해 한국 핸드볼에 이바지했다면 오성옥 감독은 지도자로 자리를 옮겨서 공헌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다양한 경험을 미래 핸드볼 기대주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그는 더 많은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한국 핸드볼을 발전시키기 위해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선수 때는 하지 않았던 것들을 지도자가 되니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 정체되지 않으려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에서 열린 국제핸드볼연맹의 프란티세크 타보르스키 부회장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이제는 개인 기술의 시대인데 이를 어떻게 키우냐가 주제였다. 세계적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선수들을 소집해 훈련 시킬 여유는 점점 줄어드는 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타보르스키 부회장은 선수 한 명, 한 명에게 알맞은 맞춤 훈련법을 주는 해법을 제시했다. 각 선수에게 과제를 줘서 기술을 발전시키는 방법이었다.”

배운 건 꼭 실천한다는 오 감독은 제자들에게 훈련법과 영상을 내밀며 혼자 개인 기술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가 키운 어린 나무들은 미래 한국 핸드볼의 대목으로 쑥쑥 자라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 가지 꿈을 귀띔하기도 했다.

“기회가 된다면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과 올림픽 무대에서 메달에 도전하고 싶다. 선수로 메달을 따봤으니 지도자로서도 메달을 목에 걸고 싶다. 지금 제자들과 서로 잘 알기에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기회는 항상 찾아올 거라고 믿고 준비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purin@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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