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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안은재 인턴기자] ‘놀라움, 부러움, 그리고 현타.’
세계영화계를 놀라게 한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 쾌거가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영화계를 뒤흔들고 있다.
지금까지는 핑계가 있었다. 세계영화산업을 주도해온 미국과 유럽을 공략하기에 언어, 문화, 역사, 기술, 자본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영화를 가로막는 벽이 너무나 높다고.
하지만 지난 10일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92년의 역사 최초로 한국어로 작품상을 수상하는 낭중지추 활약을 보이며, 침묵하던 아시아 영화인과 영화팬들의 심장을 달궜다. ‘기생충’과 봉준호 감독이 만들어낸 기분 좋은 후폭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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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언제쯤 중국도 다른 나라처럼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기생충’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세상을 놀라게했던 지난해 5월. 뒤늦게 이 작품을 보려는 아시아 각국의 배급망이 움직였다.
중국에서도 지난해 7월 지역영화제 중 하나인 시닝퍼스트청년영화제 폐막식에서 ‘기생충’을 상영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기술적인 원인으로 영화의 상영은 결국 금지되었다. 웨이보에는 “언제쯤 중국도 다른 나라 처럼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개탄의 글이 올라왔다.
여기서 말하는 ‘기술적인 문제’가 중국공산당이 ‘시진핑(習近平) 사회주의 사상’과 배척된다고 판단되는 문제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 중국인들은 자국민의 사상검열을 위한 이 변명을 반복해서 듣고 있다.
이를 두고 중국인들은 “맨날 기술적인 문제로 안된다면서 영화제는 왜 여는 거냐”, “기술적인 문제라…이해했다!”며 당국의 사상 검열을 비꼬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 배후로 지목되는 중국 중앙선전부는 사상 검열은 물론 정부의 사회주의 사상을 널리 전파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작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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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종교상의 이유로 이 영화 못보는 넷우익들 정말 불쌍”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 수상 소식을 발빠르게 타전했던 일본 언론 보도에 대한 한 일본 네티즌의 댓글이다.
‘넷우익’이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일본국수주의 이용자들을 일컫는 말로, 이 네티즌은 마치 광신도 집단같다고 비꼬며 “종교상의 이유로 ‘기생충’을 못보는 넷우익이 정말 불쌍하다”고 말한 것.
일제치하 강제징용에 대한 국가배상 문제를 시작으로 지난해 7월 일본의 한국수출규제, 한국의 지소미아(GSOMIA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 시사까지 최근 그 어느 때보다 한국과 팽팽하게 대립해온 일본이지만 ‘기생충’의 위업에는 감탄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속보에 대한 반응은 경탄 그 자체였다. 5채널에서는 “대박. 외국영화상이나 아시아 뭐 이런거 아니고 오스카 주요 부문이잖아?”, “같은 아시아로서 자랑스럽다”, “미국에서도 제대로 평가됐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 사상 최초다” 등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금세 수상시비가 불거진다. 야후재팬에서는10일 “‘기생충’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이 납득가는가?”란 설문 조사를 진행해 논란을 자초했다.
이 설문에는 11일 0시 20분 기준 5781명이 참여했고 ‘납득할 수 있다’에 74%, ‘납득할 수 없다’에 26%가 투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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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 영화 맹주 자처했던 중국과 일본, 쇠락의 30년
중국과 일본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아시아 영화강국이라는 자존심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중국 영화는 세계 3대 영화제(칸영화제 베니스영화제 베를린영화제)를 제패했다. 장 이모우 감독은 영화 ‘붉은 수수밭’으로 1988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작품상을, 1992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영화 ‘귀주’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배우 공리)을, 그리고 ‘패왕별희’의 첸 카이거 감독이 1993년 칸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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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이보다 앞서 작품상을 들어올렸다. 일본영화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195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라쇼몽’으로 작품상을 수상한 뒤 1950~1960년대 영화계 황금기룰 누렸다.
아카데미상도 일찌감치 받았다. 1958년 배우 우메키 미요시가 영호 ‘사요나라’로 여우조연상, 2003년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장편 애니메이션 상, 영화 ‘굿바이’의 타키타 요지로 감독이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면서 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오스카 후보에 올랐고, 가장 많은 오스카 상을 받았다.
아시아계 영화인하면 할리우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만 출신 이안 감독을 빼놓을 수 없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로 널리 알려진 이안 감독은 아시아 감독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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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와호장룡’으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고 2006년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과 2013년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안 감독은 할리우드 활동과 관련된 질문에 “서양에서 만들어진 영화라는 예술에 동양의 색채를 잘 입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변한 바 있다.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일본과 중국은 각각 10편, 12편의 작품상을 수상했으나 한국은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칸영화제 황금종려상) 등 2편에 그쳤다.
◇아시아영화의 ‘넘사벽’이었던 오스카, 한국어로 뛰어 넘어버린 ‘기생충’유수의 아시아 영화들이 국제무대에서 활약했지만 유독 그 벽이 높았던 곳이 세계 영화산업의 중심 미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이었다. ‘백인남성들의 잔치’라는 뜻으로 ‘오스카 쏘 화이트(Oscar so white)’라는 조롱을 받기도 하지만, 대중성과 상업성을 중요 평가요소로 꼽는 아카데미 시상식은 예술영화에 무게가 쏠리는 유럽의 3대 영화제와는 또 다른 결의 권위를 갖고 있다.
아시아 영화에게는 참으로 인색했던 오스카 티켓으로 완주에 성공한 작품이 바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다. ‘기생충’은 자본주의의 총아 미국에서 극대화 되고 있는 빈부격차를 지상과 지하, 향기와 냄새라는 장치로 연출한 영화를 선보였고, 이 도발적인 블랙코미디에 미국인들은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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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의 성과는 중국과 일본에서 새로운 숙제로 다가오고 있다.
2020년 중국영화시장은 미국을 제치고 세계 영화 시장 1위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규모는 커지고 있지만, 영화 감독들의 고민은 깊어진다. 점점 심해지는 중국 정부의 검열과 중국영화의 상업화 때문이다.
중국의 유명 영화감독 티엔주앙주앙은 “일부를 제외하면 더욱 상업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에 더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라며 우려를 표시했다. 티엔주앙주앙은 중국 영화 황금기를 연 5세대 대표 감독으로 대표작으로는 ‘말도둑’이 있다.
일본 영화 시장은 흥행보증수표인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실사영화가 주를 이루면서 장르적 한계에 봉착했다. 그 결과 독창적인 원작 각본을 가진 장편영화가 극장에서 사라지고 있다. 지난해 일본 최고 흥행작 역시 애니메이션 ‘날씨의 아이’ 였다.
이기형 경희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12일 “일본과 중국은 아시아 문화 대표로 서구에 소개된 역사가 있다. 한국은 훨씬 뒤였다”며 “한국영화가 중국과 일본이 하지 못한 것을 해냈다고 말하기에는 봉준호 감독 한 명만의 이야기이지만 2000년대 이후 홍상수, 박찬욱, 김보라 등 쟁쟁한 감독들이 등장하고 있다. 한국이 문화강국 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아시아 영화들이 세계영화제에서 오리엔탈리즘(동양에 대한 서구의 왜곡과 편견)에 기인해 수상을 했다면, 백인들의 잔치였던 ‘오스카’에서는 대중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라는 의의를 덧붙였다.
eunjae@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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