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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배우근기자] 4월 15일을 맞아 메이저리그(ML)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이 집중 조명되고 있다. 그가 메이저리그에 첫 발을 내딛은 1947년 4월 15일로 부터 73년이 흘렀다. 그러나 등번호 42번의 재키 로빈슨은 여전히 불멸의 존재로 우뚝 서 있다.
메이저리그에는 30개 전 구단 영구 결번이 있다.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로 인종차별의 벽을 허문 재키 로빈슨의 등번호 42번이다. 1997년 ML사무국은 42번을 전 구단 영구 결변으로 지정했고 그 이후 아무도 그 번호를 달지 못하게 됐다.
재키 로빈슨은 메이저리그에 1947년 4월 15일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데뷔했다. 미국에 흑인 야구 선수는 많이 있었으나 그들은 니그로 리그에서만 뛰었다.
그러나 브루클린 다저스의 브랜치 리키 단장과 월터 오말리 구단주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깨고 실력이 뛰어난 재키 로빈슨을 영입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의미있는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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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라운드에 나올 때마다 쏟아진 수모와 냉대는 로빈슨 스스로 이겨내야 했다. 관중의 심한 야유, 상대선수의 방해, 심판의 편파 판정이 그를 힘들게 했다. 타석에서는 계속해서 몸 쪽으로 공이 날아왔고 수비하던 1루 베이스에서는 주자의 거친 발길질에 시달려야 했다.
필라델피아의 감독이었던 벤 채프먼은 그를 향해 “강제 노동이나 하던 흑인 노예가 무슨 야구를 하나. 농장으로 돌아가라”고 야유했다. 로빈슨은 경기가 끝난 뒤에는 숙박 거부를 당하는 등 시련이 이어졌다. 동료들도 그를 배척했다.
그러나 1947년 5월 14일 인종차별의 높은 벽을 허무는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그날 브루클린 다저스는 신시내티 레즈와의 원정 경기를 치렀는데, 경기에 앞서 분노한 백인들이 다저스 구단과 재키 로빈슨에게 수많은 협박 편지를 보냈다. “경기를 하러 크로슬리 필드에 들어오면 죽여버리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만큼 당시 분위기는 살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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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로빈슨이 필드에 모습을 나타내자 관중들이 야유를 퍼부으며 “니그로”라고 외쳤다. 신시내티 레즈 선수들도 폭언에 가세했다.
그러자 다저스의 유격수 피 위 리즈가 1루로 걸어와 로빈슨 옆에 섰다. 리즈는 인종차별로 유명한 켄터키 주 루이빌 출신이었다. 관중의 시선이 집중되자 그는 1루수 재키 로빈슨을 끌어안았다. 최악으로 치닫던 경기장 분위기는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그날 보여준 리즈의 포옹은 야구계 전체가 흑인 재키 로빈슨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며 메이저리그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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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저스 동료들은 42번을 총으로 쏘겠다는 협박에 항의하는 뜻에서 모두 로빈슨의 등 번호 42번을 달고 출전하기도 했다. 현재 메이저리그에서는 4월 15일이 되면 30개 구단의 모든 선수가 42번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서고 있다.
동료들의 응원에 힘입은 재키 로빈슨은 메이저리그에서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28세에 데뷔해 10시즌 동안 1382경기에 출전해 타율 0.311에 137홈런을 기록했다.
당뇨병 증세로 은퇴한 뒤에는 사업을 하며 흑인들의 일자리 창출에 힘쓰는 등 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등번호 42번의 개척자는 지병인 당뇨로 53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kenny@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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