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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고진현기자]지난 15일은 스승의 날. 스포츠 세계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남다르다. 성공의 꽃을 피우기 위해 고통을 인내하는 과정에 함께 동행하는 그런 사이이기 때문이다. 때론 혹독하게, 때론 부드럽게. 본능에 충실한 선수들을 어르고 달래는 지도자들의 리더십은 그리 녹록치 않다. 부드러운 덕성은 물론 대담한 용기,그리고 사물과 현상의 배후를 파고드는 통찰력과 결단까지. 그야말로 시시각각 변신하는 카멜레온 같은 능력을 갖추지 않고선 결코 훌륭한 지도자를 꿈꿀 수 없다. 한국 체육의 영광스런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아야 할 게 있다. 바로 지도자의 역할이다. 한국이 체육강국으로 진입한 데는 스포츠국가주의(state amateurism) 정책을 택한 정부의 결단력과 뚜렷한 목표의식을 지닌 선수가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우수한 지도자의 역할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한국 체육에서 지도자를 빼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기적의 퍼포먼스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한국이 체육을 급성장시키기 위해 취한 전략은 엘리트 스포츠를 지향한 학교 체육 시스템이다. 체육 선진국과 달리 지역사회가 아닌 학교를 체육의 거점으로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스포츠를 구성하는 선수, 지도자, 인프라 등 3가지 핵심요소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 당시 한국사회에선 학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도자 인력풀이 교육수준이 높은 교사가 중심이 됐던 것도 바로 그래서다. 다른 분야에 견줘 앞서 있던 교육 시스템에서 배출된 교사가 체육 지도자의 역할을 떠맡으면서 한국은 짧은 시간에 체육강국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교사출신이 지도자의 주류를 형성한 덕분인지 한국 체육은 지도자들의 남다른 학구열을 바탕으로 한 선진 시스템에 대한 연구와 수용이 원활하게 이뤄졌다. 그게 바로 한국 체육의 기틀을 닦은 결정적 원동력이라는 평가다. 어디 그 뿐이랴,간과해서는 안될 게 하나 더 있다. 선수들을 자기 자식처럼 살뜰하게 챙기며 사제지간을 가족관계로 치환해 엄청난 시너지효과를 불러 일으킨 사실이다. 선수들을 향한 지도자의 사랑과 헌신이 한국 체육의 든든한 뿌리가 됐고,그게 결국 화려한 꽃을 피우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게 필자의 확신이다.
모두가 지금의 한국 체육을 위기라고 한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타자와의 대결,즉 경기력에 매몰되면서 놓쳤던 체육의 다양한 가치가 체육 패러다임의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뼈를 깎는 체육계의 자성이 요구되면서 외부로부터 부는 개혁의 바람도 심상치 않다. 그렇다고 과거의 모든 걸 없애고 지워서는 곤란하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살려 과거의 훌륭한 점을 배우는 자세도 필요하다. 그게 바로 한국 체육의 든든한 뿌리가 됐던 지도자의 헌신적인 태도가 아닐까 싶다. 최근 그 아름답던 한국 체육의 사제지간에도 많은 균열이 생겼다. 간도 크게 스승의 약점을 캐기 위해 대화내용을 휴대폰으로 녹음을 한다던가,서로가 서로를 이해관계로 여기는 태도는 과거의 아름다웠던 사제관계를 간절히 추억하게 만든다.
지금의 지도자들은 스포츠를 통해 얻을 건 다 얻은 지도자가 많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모든 걸 던지지 않고 선수들과 적당히 타협한다. 극한의 고통속에서 죽음의 냄새가 난다는 한계상황에 선수들을 몰아붙이지도 못한다. 그래봐야 되돌아오는 건 날선 감정의 화살밖에 없기 때문이다. 적당히 타협하고 흥정하는 가운데 싹트는 건 진실이 아니라 허위와 가식 뿐이다.
흘린 땀과 몸으로 표현되는 스포츠는 그 어떤 분야보다 진실하다. 서로 믿고 의지하는 그런 사제관계가 형성되지 못하면 절대 꽃을 피울 수 없는 분야가 바로 스포츠 세계다. 가식의 꽃은 에너지를 품지 못해서인지 향기도 나지 않을 뿐더러 아름답지도 못하다. 모든 걸 쏟아붓고 진실을 다할 때만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게 바로 세상의 이치이자 스포츠계의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부모와 진배없었던 과거의 지도자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지난 스승의 날에 불현듯 떠오른 단상(斷想)이다.
편집국장 jhkoh@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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