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영화 ‘행복의 나라’ 시나리오는 10년 넘게 영화계를 전전했다. 당시 2010년대 가장 재밌는 각본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10.26 대통령 시해 사건을 소재로 하는 작품이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재임하고 있던 기간이라 시기적으로 맞지 않아 계속 밀려났다.
추창민 감독도 이미 시나리오를 읽었다. 워낙 재밌게 읽은 작품이라 또렷이 기억했다. 돌고 돌아 다시 그 이야기가 추 감독 품에 들어왔다. 10년 전엔 최고로 불렸지만, 시간이 지나니 예스러워졌다는 인상이 컸다. 직접 펜을 들고 각색을 시작했다.
추창민 감독은 “처음엔 박태주(이선균 분)가 주인공이었고, 감성적인 서사도 많았다. 훌륭한 분이지만, 영화로 조명하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겪은 시대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가공의 인물 정인후(조정석 분)를 만들었고, 전상두(유재명 분)의 야만성을 더 부각했다”고 말했다.
‘행복의 나라’는 10.26 대통령 시해 사건에 가담한 박태주가 권력의 시녀가 된 군 판사들 때문에 원칙 없이 재판을 받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평범한 변호사의 눈으로 강직한 원칙주의자 박태주와 시스템 파괴자 전상두를 대비해 보여준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 시대를 빌려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야만성을 보여주고 싶었죠. 요즘도 곳곳에서 보면 원칙이 매몰됐잖아요. 권력을 가진 자가 원칙을 잃어버렸다는 게 현시점하고 맞물리는 것 같아요.”
박태주란 인물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평가를 받을 만한 인물인지 물음표가 생긴다. 10.26 사건을 깔끔하게 매듭짓지 못한 탓에 오히려 더 강력한 괴물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8년이 더뎌졌다. 그사이 셀 수없는 무고한 희생도 있었다.
“정치사적으론 평가가 엇갈리죠. 그래도 박태주의 모티프였던 박흥주 대령은 미담만 나오는 사람이에요. 군인 사이에서도 평가가 좋고요. 동료들이 꾸준히 돈을 모아서 그의 가족을 후원했어요. 그만큼 인망이 있었던 사람이죠. 메인 주인공으로는 적절치 않지만, 그를 활용해서 시대상을 그려내는 건 괜찮다고 봤어요.”
지극히 속물적이었지만, 박태주를 만나 원칙의 중요성을 깨달은 변호사 정인후를 조정석이 맡고, 故 이선균은 강직한 군인 박태주를 그려낸다. 차갑고 냉철한 보안사령관 전상두는 유재명이 표현했다. 세 사람의 연기를 보는 맛이 ‘행복의 나라’을 끌리게 만드는 요소다.
“조정석은 스포츠카 같은 배우예요. 제가 제안을 하면 순식간에 바꿔요. 순발력도 좋고 머리도 좋아요. 배우가 디렉팅을 받아들이고 표현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한데 정석이는 그 시간을 짧게 잘 써요. 이선균은 소년 같아요. 뜨거움이 있죠. 어떤 연기든 정말 잘해요. 이선균과 함께 한 시간은 제게 영광이었어요. 유재명도 말할 게 없죠. 잘할 줄 알았습니다.”
영화 후반부 정인후는 당시 최고 권력이었던 전상두를 만나 일갈한다. 지극히 현실적인 영화 분위기가 갑작스레 판타지로 전환된다. 감독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호불호가 많이 갈리더라고요. 변호사가 권력자에게 일갈하는 건 말이 안 되긴 하죠. 그래도 그 장면은 필요했어요. 당시 야만성을 가진 권력자가 있고, 그에 저항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어요. 수많은 사람이 정인후로 대변된 거죠. 전상두는 개인이기도 하지만, 모든 시대의 파렴치한 권력자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에게 일갈을 꼭 해주고 싶었습니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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