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강지윤기자] "오리가 도살되는 짧은 장면을 본 순간 믿음이 깨졌죠. 아, 인도적인 도살 같은 건 없구나."


살점과 고기, 돼지(pig)와 돼지고기(fork)라는 단어의 간극엔 은폐된 폭력이 있다. 정갈하게 포장된 고기 뒤에는 오직 상품으로 취급돼 사육장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동물이, 자연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도살당한 생명이 존재한다.


농림축산검역본부에 따르면 2018년 국내에서만 무려 10억483만 마리의 닭, 1737만 마리의 돼지, 87만 마리의 소가 도살되었다고 한다. '동물은 어떤 생명이 다른 생명보다 귀중하다고 주장하는 세계관의 무고한 희생자들이다'라는 동물 보호 운동가 스티븐 시몬스의 말을 떠올려보자. 지배종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종 차별적인 시각을 거둔다면 위의 수치는 실로 놀랍고 잔인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초식마녀' 박지혜(34)는 SNS에서 유명한 비건(Vegan : 채식주의자의 단계로 식물성 음식만을 섭취하는 것) 인플루언서다. 그는 다큐멘터리 속 동물 도살 장면을 본 후 더는 육식을 정당화할 수 없어 비건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고기로 태어나지 않았어', '크리스마스엔 도살장도 쉬려나' 등의 짧은 멘트가 담긴 웹툰과 다양한 레시피 영상으로 비건라이프를 공유하고 있다. 음식은 물론 비건 화장품, 제로웨이스트 등 동물과 환경을 보호하며 함께 살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는 지난 1월 MBC ‘볼빨간 신선놀음’에 출연해 ‘채식 마라 라면’을 선보였다. MC 4명에게 모두 합격점을 받으며 고기 없는 식단에 상상력을 불어넣은 것. 초식마녀는 "방송에 노출되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방송에서 채식을 다룬다는 점이 반가웠다"라며 출연 소감을 전했다.


평범한 직장인이 비건 인플루언서가 되기까지, ‘초식마녀’ 박지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비건 유튜브를 운영하는 구 회사원·현 작가 초식마녀입니다.


Q. 언제부터 채식을 시작하셨나요?


2019년 2월부터 비건 식을 시작했습니다. 육식의 이면을 다룬 다큐멘터리 '왓 더 헬스(What the health)'와 '카우스피러시(Cowspiracy)'를 시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죠. 긴 세월 육식을 하며 ‘내가 먹는 고기는 고통 없이 살다 인도적으로 도살되었으리라’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어요.


그러다 이상적인 농장에서 자란 오리가 도살되는 짧은 장면을 보게 됐고 믿음이 깨졌습니다. 아, 어떤 환경이든 인도적인 도살 같은 건 없구나…. 육식에 대한 합리화가 불가능해지자 더는 먹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 한 장면 때문에 채식을 택하게 된 건 아니에요. 2014년 유기견을 돌보는 경험을 하며 언젠간 채식주의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동안 누적되어온 육식에 대한 불편함이 한계치를 넘어섰던 것 같아요.


Q. 그러니까 동물권을 이유로 채식을 선택하신 거군요.


우리는 상호 이익이 충돌할 때 어느 것이 더 우월한가를 판단하고 택하곤 하죠. 지금은 인간의 기호나 편의 같은 사소한 이익이 동물의 생존권과 고통당하지 않을 권리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시대고요.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사회라고 생각해요. 동물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불균형을 균형으로 돌리기 위한 노력입니다.


동물권은 인권과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에요. 동물권이 높아지면 인권이 낮아질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을 종종 보는데 오히려 비례하는 관계에 가깝습니다. 동물의 권익이 보호되는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필연적으로 인권문제의 상당 부분이 나을 것이라 생각해요.


Q. 이외에도 채식을 지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 모두의 집인 지구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요. 개인이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에요. 채식을 하면 탄소배출량과 물 소비도 줄일 수 있고 동물들의 희생도 줄일 수 있어요. 다 같이 살아남고 싶다면, 오늘 조금 더 비건!


Q. 채식 외에 동물과 환경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는 것!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와 포장 용기 등 일회용품 배출량이 굉장히 증가했다고 해요. 모두가 지치고 힘든 시기라서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고 싶다면 당장 편리한 것을 줄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생산-소비-폐기까지 가급적 환경에 덜 부담이 가고 적은 흔적을 남기는 것을 택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 펫샵 등에서 동물을 구매하지 말아 주세요. 진열된 사랑스러운 새끼 동물 뒤에는 평생을 갇혀 임신당하다 죽는 어미 동물이 있습니다. 귀엽다고 교육적이라고 쉽게 사고 버리지 말아 주세요. 알다시피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은 많은 노동력과 경제력이 드는 일이잖아요.


Q. 작년 목표가 식물성 오일인 팜유 줄이기였다고요?


저도 비건을 시작하고 알게 되었는데, 식물성 식품이라고 무조건 '비건'은 아니더라고요. 팜유처럼 생산 과정에서 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거나 코코넛처럼 직접적으로 동물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들이 존재해요. 동물 착취는 굉장히 촘촘하고 넓게 퍼져있기 때문에 완벽하게 피할 순 없겠지만 의식적으로 노력해야겠다는 마음에서 새해 목표로 삼았죠. 올해도 좀 더 줄일 수 있으면 좋겠어요.


Q. 남편도 비건인가요? 아니라면 식단에 갈등이 있을 것 같은데요.


남편도 채식을 지향하고 있어요.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선 육식을 하지만 같은 가치관 속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질문의 포커스는 '채식'이 아닌 '관계'에 있다고 봐요. 제가 무엇을 하든 남편이 지지하고 함께해주리란 믿음이 있어요.


채식뿐 아니라 다른 변화가 찾아오더라도 신뢰와 이해를 바탕으로 지금처럼 유지되리라 생각합니다. 너무 이상적인 부부 사이처럼 말했나요? 남편 의견도 들어봐야 할 거 같은데. 하하.


Q. SNS를 통해 비건 라이프를 공유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원래 직업은 일러스트레이터입니다. 비건 레시피 만화를 인스타그램에 공유하던 중 주변 작가님들이 유튜브를 권하셨죠. 유튜브를 즐겨 보지도 않았던 인간이라 고민하다 여러 사람이 추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싶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덜컥 시작했습니다. 흑역사가 될까 두려웠지만 제 만화나 영상을 보고 누군가가 한 끼라도 채식을 택한다면 그걸로 의미 있으니까요.


Q. 이렇게 다양한 비건 레시피가 있을 줄 몰랐어요.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나요?


원래 먹는 걸 좋아해 아끼지 않고 돈을 썼어요. 새로운 음식 낯선 식재료도 거침없이 도전하는 편이었고요. 그게 기반이 된 것 같아요. 식재료를 보면 ‘아! 이러면 내가 좋아하겠다’ 싶은 조리법이 떠올라요.


Q. 다양한 레시피를 선보이시던데, 가장 선호하는 식재료는 무엇인가요?


비건 실천 초반에는 들기름과 들깻가루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나물이든 버섯이든 이 둘을 넣으면 무조건 맛있더라고요. 제 레시피 중에선 마라크림떡볶이를 가장 좋아해요. 마라에 두유를 넣으면 속도 편하고 크리미해서 훨씬 맛있답니다.


Q. 웹툰을 그리고 영상을 찍을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면요?


민감한 주제를 다루다 보니 그림보다는 이야기에 많은 공을 들이는 편이에요. 우월의식에 젖은 계몽주의자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 수위나 표현을 꼼꼼하게 검열하죠. 오해 자체가 두렵기보다는 오해 때문에 메시지가 흐려질까 봐요.


Q. '다큐플러스', '쿨까당', '볼빨간 신선놀음' 등의 방송에도 출연하셨어요.


내성적인 편이라 카메라 앞에 말하는 것이 어렵고 부담스러웠지만 기뻤습니다. 방송에서 채식을 다룬다는 점이 반가웠고, 조금이나마 역할을 할 수 있어 감사했어요. 오늘 인터뷰도 정말 감사해요. 매체에 노출될 때마다 가족들이 기뻐하거든요. 덕분에 부모님도 제가 채식하는 걸 긍정적으로 보시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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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ㅣ초식마녀 제공, 초식마녀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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