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조은별기자]“저도 어린 시절 아파트에서 성장했어요. 복도식 아파트에서도 살아봤고 계단식 아파트에서도 살아봤죠. 그 때는 복도에서 뛰어놀다 옆집에서 밥 먹고 집에 들어가곤 했는데 그런 경험을 영화에도 녹여냈죠.”

광복절 연휴, 한국영화 박스오피스 승자인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엄태화 감독은 그 자신도 ‘아파트 키드’라고 고백했다. 그런 어린 시절의 경험과 김숭늉 작가의 원작 웹툰 ‘유쾌한 왕따’ 2부의 메시지, 그리고 박해천 교수의 저서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구성하는 소재가 됐다.

영화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황궁아파트’ 주민들의 생존기를 그렸다.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재난 상황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안겼다.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이 공통적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부분은 배우의 연기, 그리고 빼어난 미장센이다. 이병헌이란 배우가 해석한 영탁은 완장을 찬 필부가 왕관의 무게를 즐기는 잔혹한 리더로 변해가는 모습을 탁월한 연기로 보여줬다.

엄감독은 과거 박찬욱 감독이 공동연출을 맡았던 ‘쓰리, 몬스터’(2004) 조연출 시절 이병헌을 처음 만난 뒤 20여 년이 지나 연출자와 배우로 재회했다. 평소 촬영장에서 정교한 디렉션을 주기보다 배우를 믿고 맡기는 것으로 잘 알려진 엄감독은 “좋은 디렉션은 좋은 배우를 알아보는 것”이라며 “배우가 해석한 시나리오를 들으며 조율하는 편이 나한테 잘 맞는데 특히 이병헌 배우가 아이디어를 많이 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병헌은 극중 영탁이 사인하는 장면에서 무의식중에 자신의 본명을 먼저 쓰는 것처럼 ‘ㅁ’자를 쓰다 지우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다.

엄감독은 말보다 꼼꼼한 사전준비가 앞서는 감독이기도 하다. 특유의 빼어난 미장센은 이 영화에 빠지게 하는 또 다른 힘이다. 일례로 당초 황궁아파트 세트는 3층까지만 지어졌지만 엄감독은 고층에서 저층을 바라보는 배우들의 시선 각도를 계산하고 점을 찍어 컴퓨터그래픽으로 목표물을 표현했다. 진짜 아파트처럼 표현하고 싶어 재개발 단지에서 문짝, 난간, 나무까지 뽑아와 세트곳곳에 심어 재난으로 황폐해진 아파트 단지를 완성해냈다.

압권은 반상회 신이다. 36명의 배우가 한 자리에 모이는 이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모든 배우에게 서사를 부여했다. 정비소 사장, 부동산 사장, 부녀회장, 갓 이사 온 주민, 원주민이 된 배우들은 각자의 사연대로 역할을 표현했다. 엄감독은 “36명이나 되는 배우들이 각자 애드리브를 치기 시작하면 합이 맞지 않을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역할을 구체적으로 정했다. 리허설 뒤에는 각 배우들에게 전화를 해 목소리 톤을 조절하기도 했다”며 “첫 테이크 뒤 모니터링해보니 각 배우들이 황궁아파트에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며 웃었다.

관객들이 영화에서 가장 으뜸으로 치는 영탁의 ‘아파트’ 부르는 장면도 꼼꼼한 사전준비로 완성된 장면이다. 살아남은걸 기념한 황궁아파트 주민들이 마을 잔치를 벌이던 날, 영탁이 윤수일의 ‘아파트’를 부를 때 환호하는 주민들의 그림자가 마치 귀신처럼 아파트 외벽에 비쳤다.

엄감독은 “어느 날 답사를 나간 성수동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 가로등이 켜있는 모습을 보니 아파트 화단에 심긴 나무들의 그림자가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다. 아파트 주민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접목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엄태화 감독의 친동생인 배우 엄태구는 영화의 ‘신스틸러’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영화를 본다면 엄태구의 등장 자체가 더욱 강렬하게 느껴진다. 엄감독은 “황궁아파트 외부에서 살아남은 노숙자를 묘사하고 싶었다”며 “장치적인 역할을 표현할 수 있는 존재감있는 배우를 찾다가 엄태구를 떠올렸다. 목소리도 특이하지 않나”라고 웃었다. 엄감독은 엄태구의 소속사를 통해 정식으로 캐스팅을 제안하기도 했다. 영화를 관람한 엄태구는 형에게 “배우들의 연기가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칭찬했다는 전언이다.

‘쓰리, 몬스터’부터 ‘친절한 금자씨’(2005)와 단편 ‘파란만장’(2010) 등 박찬욱 감독의 조연출을 역임하며 박감독의 애제자로도 잘 알려진 엄감독은 이번 작품으로 ‘포스트 박찬욱’이라는 평가까지 얻게 됐다. 실제 박찬욱 감독은 지난 4일 스페셜 GV에 참석하는 등 제자에 대한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엄감독은 “기분은 좋지만 과분한 칭찬”이라고 손을 저었다.

“선배 감독님들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확장해 길을 만들어 놓아서 꿈꿀 수 있는 범위가 넓어졌어요. 그 길을 따라가게 만들어 준 게 선배감독님들이죠. 저도 선배님들의 작품을 통해 영향을 받았어요.”

mulgae@sportsseoul.com

기사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