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혼 소송 중 다시 소환된 30년 전 ‘비자금’ 논란

■ 태평양증권(SK증권) 인수 자금 출처는…노 관장 “노 전 대통령 자금”

■ 대법원 판결, 2심 뒤집나?

[스포츠서울 | 최규리 기자] “못난 노태우, 외람되게 국민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5년 동안 약 5000억 원의 통치자금이 조성되었습니다. 주로 기업인들로부터 성금으로 받아 조성된 이 자금은 저의 책임 아래 대부분 정당 운영비 등 정치활동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깐 이 모든 시작은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문에서 출발한다. 30여년 전 소문으로만 돌던 ‘전직 대통령 중 한 사람의 4000억원 가·차명계좌 보유설’이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노 전 대통령이 지목됐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이런 해괴하고 황당한 얘기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며 부인했지만, 수사 끝에 모든 것을 인정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눈물까지 훔치면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다.

지난달 1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이혼 소송 항소심 공판에 나란히 출석하는 최 회장과 노 관장. 사진 | 연합뉴스

전 대통령의 비자금 거래 사실인정은 전 국민에게 충격과 분노를 안겨줬다. 이후에도 노 전 대통령은 김대중 비자금 수수 시인, 14대 대선 자금 문제 등과 얽히며 결국 1995년 11월 서울구치소에 수감된다. 구속되어 갇힌 지 2년1개월여 만에 석방되지만, 이는 엄청난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사건으로, 단순히 노 전 대통령만의 문제가 아니게 됐다.

비자금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30년 후 노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으로 나타나고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추정되는 300억원의 존재가 딸의 이혼소송 항소심에서 30여년 만에 새로 드러난 것.

◇ 엄마가 보관해 둔 ‘선경 300억원’ 메모, 1심 뒤집긴 했는데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지난 3월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SK 최태원 회장과의 이혼 소송 항소심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지난달 3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가사2부(김시철 김옥곤 이동현 부장판사)는 전날 역대 최대인 1조3808억원을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노 관장에게 현금으로 분할하라고 선고했다.

재판부는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가 보관해온 1991년 선경건설(SK에코플랜트 전신) 명의 약속어음과 메모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의 자금 300억원이 최 회장의 선친인 최종현 전 회장에게 흘러 들어갔다고 봤다.

이 메모는 김 여사가 1998년 4월, 1999년 2월에 노 전 대통령이 조성한 비자금을 기재한 것이다. 여기에 ‘선경 300억원’이 쓰여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여사는 또 ‘선경 300’이라는 문구가 기재된 봉투에 액면가 50억원짜리 어음 6장을 넣고 보관했다고 한다.

노 관장 측은 항소심에서 메모와 어음을 증거로 제출하며 1991년 노 전 대통령이 비자금 300억원을 건네는 대신 최 전 회장은 담보로 선경건설 명의로 이 어음을 전달했으며, 이 돈이 1991년 태평양증권 인수나 선경(SK)그룹의 경영활동에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이는 1심 결과를 뒤집는 결정적 증거가 됐다. 재판부는 이 돈이 SK그룹 성장의 종잣돈이 됐다고 판단하며, 재산분할 액수를 1심의 20배 수준으로 높였다. 역대급 비싼 이혼 값이 나온 배경이다.

이에 최 회장 측은 노 전 대통령 퇴임 후 활동비를 요구하면 주겠다는 약속이었다고 항변했다. 당시 최 전 회장은 노 전 대통령이 취임한 해인 1988년 30억원을 준비해 갔는데, 노 전 대통령은 “사돈끼리 돈을 주고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물리쳤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미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확보한 노 전 대통령이 과거 돈을 돌려보낸 상황에서 이런 약속(활동비)을 하면서 약속어음을 받았다는 것을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 가정의 가치와 비자금은 별개

“통치자금을 조성한 것도 비난받아 마땅할 터인데 이를 국가와 국민을 위해 유용하게 처리하지 못한 것은 더더욱 큰 잘못이었습니다. 이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저에게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내리시는 어떠한 심판도 달게 받겠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1995년 대국민 사과문 발표 당시 이같이 발언했다. 엄연한 ‘검은돈’임을 인정한 것. 지속적으로 논란이 돼 오던 정경유착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꼴이 됐다.

최태원 SK 회장이 지난달 서울 중구 한 호텔에서 열린 빈 자이드 알 나하얀 아랍에미리트(UAE) 대통령과의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당시 여신 규제에 묶여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선경은 현금을 동원해 태평양 증권을 인수했다. 이에 지금도 이때의 자금 출처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비자금이 SK그룹 성장에 기여했다는 논란이다.

대척점의 최 회장 측은 “태평양증권의 매입 자금은 선경 계열사에서 조달한 자금이다. 대통령 사위라는 이유로 손해를 봤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관련 자료가 없다며 이 주장을 배척했다.

재판부는 노 전 대통령의 자금 300억원이 최 전 회장에게 흘러간 것으로 인정하고, 노 전 대통령이 ‘방패막’ 역할을 했다고 인정한 것.

되돌아보면, SK그룹이 노 대통령 후광으로 성장한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대통령 ‘사돈’에 대한 밀어주기로 SK그룹이 변곡점 마다 성장했다는 의미다. 이에 양측의 주장이 어떻든, 비자금·보호막 논란은 피해 갈 수 없을 것으로 관측된다.

다만 법조계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유·무형적 기여가 인정되더라도 그것을 노 관장의 기여로 볼 것이냐가 상고심에서 다시 쟁점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비자금 논란이 대법원 확정판결에 영향이 있을 것으로 전망하는 이유다. gyuri@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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