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배우근 기자] 미풍에 흔들리는 얇은 꽃잎을 화폭에 담는 작가 윤형선이 14번째 개인전을 연다. 윤형선은 ‘번짐과 스밈’이라는 독특한 기법으로 인간의 몸짓을 꽃잎에 투영해 숨을 불어넣는다.
이번 개인전의 주체는 꽃, 특히 융화한 생명으로의 심화다. 꽃잎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는 순간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데 중점을 뒀다. 꽃의 움직임은 옷자락의 너울거림과 오버랩한다.
꽃과 춤의 상생은 어린 시절 강렬했던 기억에서 출발한다. 윤형선은 그때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작가노트에 기술한다.
“선망의 대상이던 무대와 무용수, 음악과 함께 춤을 추던 옷자락의 너울거림은 강렬한 무대조명과 함께 현실과 동떨어진 꿈속의 환영처럼 무의식 속에 남아있었다. 그 기억이 바람과 빛의 감정을 형상으로 드러내던 꽃의 모습을 통해 반응하고 소통하면서 꽃과 무용수의 몸짓, 순결을 지향하던 나의 마음이 융합된 상(象) 밖의 표상적(表象的) 이미지를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심미적(審美的) 경험은 나의 작품세계에 절대적 영향을 주었다”
화가 윤형선은 어린 시절 한국무용을 했다. 그리고 평생의 나침반이 될 장면과 마주한다. 어린 윤형선은 무대 한켠에서 소복(素服)의 전문 무용수들이 살풀이춤을 펼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흰 옷자락은 조명에 따라 색을 바꿔가며 너울거렸다.
길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윤형선에겐 꿈속 환영처럼 무의식에 깊게 자리 잡게 된다. 그 심미적 이미지는 오랜 기간 그의 몸속에서 바람과 빛을 받으려 숙성됐고, 마침내 손끝을 타고 나와 지난 20년간 화폭에 차곡차곡 형상화되고 있다.
작품 초기엔 꽃에서 배어 나오는 표상에 집중했지만, 어느새 추상화처럼 몽환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꽃의 내면까지 깊게 파고들어 가면서, 생명의 정수는 원형질로 단순화되었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수분과 영양분을 빨아당기는 뿌리와 줄기는 생략하지만, 전체를 상징하는 화판(花辦)이 화판(畫板)에 구현된 작품을 마주할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작가의 해석법은 주변에도 전파되고 있다. 작가는 대학에서 후학을 지도하며 ‘그대로 그리기’가 아닌 ‘마음 담기’를 강조한다.
이를테면 꽃을 그리기 전에, 꽃에서 느껴지는 3가지 키워드를 먼저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끌어올린 3가지 키워드를 꽃 그림에 온전히 담게 한다.
물체의 근본에서 출발해 화가의 마음을 거쳐 표현하는 노력을 통해, 새로운 꽃으로 창조하는 자세를 강조하는 것.
윤형선 또한 그러한 과정을 무한히 거쳐 새로운 작품을 세상에 꾸준히 내놓고 있다. 그 연속선상에서 표현 방식 또한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수천 수만번의 붓질보다 힘든 번짐과 스밈 기법이 대표적이다.
흔히들 작품이 클수록 감동도 커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윤형선은 번짐과 스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80호 사이즈(약 가로세로 150cm·100cm)를 최대치로 작업 중이다. 이유가 있다.
번짐은 붓질이 아니다. 페인트를 화판에 부어 의도한 흐름을 만든다. 그리고 화판을 흔들어 기획해둔 형상을 창조한다. 80호 정도의 화판은 성인 남성도 양손으로 잡기 힘든 사이즈인데, 윤형선은 무거운 화판을 핸들링하며 꽃을 형상화한다. 그 와중에 의도와 빗나가며 버리는 작품이 부지기수다. 계획은 늘 있지만 어긋나기 일쑤고 몸은 다시 고되다.
화판 흔들기에 이어 번짐을 화폭에 잘 담기 위해 분무기도 종류별로 준비해야 한다. 윤형선은 각각 효과가 다른 10개 이상의 분무기를 이용해 스밈을 세밀하게 우려낸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커다란 화판을 들고 내리는 것의 반복이며 체력과의 대거리이기도 하다. 이게 끝이 아니다. 도공이 3일 밤낮 불 조절을 하는 것처럼, 윤형선은 건조 과정에 선풍기의 바람을 수시로 조정하며 번짐의 멈춤선을 조절한다.
지난한 고통을 거쳐 이번 개인전에서 소개하는 대상은 모란(목단)이다. 자고로 ‘꽃의 왕은 모란이고 꽃의 재상은 작약’이라는 말이 있다. 모란은 부귀의 상징이다. 윤형선은 “모란은 너무 탐스럽다. 보고 있으면 양손으로 감싸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개인적으로도 모란을 좋아한다”라고 천착한 배경을 밝혔다.
작가는 모란 이전에 양귀비 등 꽃뿐만 아니라 잉어와 곤충 등 다양한 소재를 발굴해 화폭으로 옮겨왔다. 그의 작품 세계에선 상호 보완적인 생명의 상생이 일관된 주제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그 대상이 모란이며 모란을 통해 잠재된 의식을 꽃의 이미지로 끌어올리고 있다.
윤형선의 그림은 여백도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작가는 화폭에 담긴 여백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무궁무진”이라고 경외감을 들어 설명한다. 여백의 의미가 없으면 공감도 없다고 강조한다.
작가의 설명처럼 그의 그림에서 흰 여백과 주제는 조화로운 공생 관계다. 번짐과 스밈으로 만들어낸 모호한 이분법적 경계도 결국은 여백과의 소통을 의미한다.
그런데 전시관을 찾아 그림을 한점 한점 들여다보니, 작가와 묘하게 닮았다. 이에 윤형선은 “너무 당연하다”고 활짝 웃으며 “이전에 잉어를 그릴 때는 잉어를 닮았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방싯했다.
화폭에 자신까지 녹여낸 것일까. 작품을 통해 화가 윤형선을 감각할 수 있는 이번 개인전은 8월 30일부터 10월 4일까지 갤러리마리(GALLERY MARIE)에서 열린다. kenny@sportsseoul.com
◆윤형선(Hyung-sun, Yun) 작가 이력
-박사/동양화전공/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 학사·석사/동양화전공/동덕여자대학교
-문화예술진흥원. 국립현대미술관. 외교통상부. 신한은행. 대전지방법원. 레이크우드C.C. 그랜드인터콘티넨탈호텔 작품소장.
-개인전 14회
-국내외 아트페어및 부스전 40여회(서울, 부산, 제네바, 규슈, 오사카, 북경등)
-국내외 단체전 130여회 (서울, 카이로, 홍콩, 뉴욕, 방글라데시, 일본, LA등)
-제20회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
-대진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울산대학교, 동덕여자대학교, 경희대학교, 진주교육대학교강사 역임
-현재 : 홍익대학교 출강
-Instagram: artist_hyungsun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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