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츠서울 배우근 기자]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이다. 우리는 ‘빨리빨리’ 문화의 대표 선두 주자였다. 그 흐름은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천천히 가더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제대로 가는 게 중요하다. 성벽을 쌓을 때 돌을 대충 쌓으면 빨리 완성할 수 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한다. 돌 하나라도 틈새 없이 차곡차곡 잘 쌓아야 수천년을 버틸 수 있는 단단한 성벽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면 날림 공사를 피할 수 없다. 그 피해는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다시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빠름과 느림의 기준이 되는 시간은 일정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절대적이지 않다. 1년 365일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한바퀴 도는 공전 주기이고 하루 24시간은 남극과 북극을 축으로 한 번 빙글 도는 자전 주기다. 시간은 공전과 자전 주기에 따라 조금씩 변하고 있다. 태양계에서 멀리 있는 행성일수록 하루를 의미하는 시간의 양은 늘어난다. 해왕성의 공전 기간은 6만 일에 달한다. 이는 164년이 넘는 시간으로 해왕성의 하루는 지구의 하루에 비해 엄청나게 길다.
그리고 지구에서 하루를 의미하는 24시간은 달과의 인력 때문에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 하루는 매년 10만 분의 7초씩 늘어나고 있는데, 공룡이 지구의 주인으로 군림하던 쥐라기의 하루는 지금보다 15분 정도 짧았다. 미래의 하루는 지금의 24시간보다 많이 길어질 것이다. 하루가 좀 길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환호할 일이다. 길어지고 때로는 짧아지는 시간은 미래로만 향한다. 시간의 화살은 과거로 방향을 틀지 못한다. 빅뱅으로부터 139억 년이 흘렀고 앞으로 별들의 생명이 다하는 데는 다시 억겁의 시간이 지나야 한다. 그 찰나의 짧은 호흡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어떤 작가는 파도가 칠 때 튀는 작은 물방울이 생겼다 사라지는 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라고도 했다. 몇 백조 년에 달할 것으로 추측되는 전체 우주의 장대한 생명 속에서 우리 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짧다.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 순간에도 인간이라는 작은 우주는 꽃을 피울 수 있다. 만약 우주를 창조한 신이 있다면, 우리가 남긴 짧은 흔적을 분명 소중하게 기억할 것이다.
지구는 적도를 기준으로 시속 1667km의 속도로 돌고 있다. 남극점과 북극점의 속도는 0에 가깝다. 북반구에 위치한 한국은 1337km의 속도로 회전하고 있다. 태양계를 방문한 외계인이 돌고 있는 지구를 보면서 “저 안에서 살고 있는 생물들은 정신이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태풍의 눈 속에 있는 것처럼 고요하다. 세상살이에 정신없이 휘둘릴 때도 많지만, 대개 찻잔 속의 폭풍처럼 금세 수그러진다. 점보 비행기에 타고 있는 사람이 시속 800km의 속도를 체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달이 지구로부터 매년 4cm씩 멀어지지만, 그 차이가 너무 작아 느끼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영원하지 않지만, 셀 수 없을 만큼 긴 우주의 시간 속에 셀 수 없을 만큼 짧은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이지만, 그럴수록 더 천천히 살아볼 필요가 있다. 안 그래도 주어진 시간이 짧은데 스스로 채찍을 들어 재촉할 필요는 없다. 사람에게는 주어진 호흡의 수가 정해져 있다고 한다고도 한다. 그 횟수를 다하면 생을 마감하는 거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호흡해야 그만큼 더 오래 살 수 있다. 이제 빠름을 능가하는 느림의 가치를 야구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서두가 길었다.
|
한국 프로야구에는 유희관이라는 특이한 투수가 한 명 있다. 운동선수 같지 않은 몸매의 그는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도 늘 환한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런데 유희관은 투수로서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데 공이 빠르지 않다는 것이다. 구속이 웬만해서는 140㎞를 넘지 못한다. 그런데도 훌륭한 좌완 투수로 인정받고 있다. 느려 보이는 몸매에 걸맞은 느린 공을 던지는데 타자들이 그를 이겨내지 못한다. 제구력과 함께 구속은 느린데 볼끝이 좋다는, 조금 앞뒤가 맞지 않는 평가를 듣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유희관이 가진 위력을 가늠하기 어렵다.
빠르게 목표를 향해 몰두하는 야구도 있다. 김성근 감독의 펑고는 받기가 어렵기로 유명했다. 날렵한 선수들이 재빨리 몸을 던지지만, 타구는 글러브를 외면했다. 그렇게 펑고를 받다보면 순식간에 지칠 수밖에 없다. 이제 그만했으면 하는 수준이 지나간 다음에 받는 펑고는 넋을 빠져나가게 한다. 그럼에도 빠르고 강한 노 감독의 펑고는 선수들의 독기를 일깨웠다. 순간적인 근력의 폭발을 촉발시킨다. 이렇게 독하게 연습했는데, 잘할 수밖에 없다는 자신감도 선수들의 가슴을 가득 채운다.
반면 메이저리그 구장에 가서 선수들이 경기 전에 배팅볼을 치는 모습을 보면 여유가 넘친다. 머리가 하얗게 센 나이 든 코치는 ‘아리랑 볼’을 던지고 배팅케이지의 타자는 툭툭 타구를 쳐낸다. 수비하는 모습은 더 여유로워 마치 공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인다. 슬슬 굴러오는 타구를 잡아 장난치듯 송구를 한다. 모든 메이저리그 구단이 다 그렇게 연습하는 건 아니지만, 독하게 훈련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사뭇 분위기부터가 다르다. 그들이 서두르지 않고 여유로운 데는 이유가 있다. 빠름을 이기는 느림의 미학이다.
빠른 공에 타격하고 빠른 타구에 수비를 하려면 자세가 무너지기 쉽다. 폼을 생각하기보다는 일단 공을 맞추고 잡는 데 급급하다. 그러나 느린 공을 칠 때는 자신의 타격 포인트에 그 공을 딱 붙여놓고 확실하게 때릴 수 있다. 야구는 타이밍과의 싸움이다. 프로 선수들이 의외로 느린 공에 헛스윙을 하기도 하는데, 그런 공에 정확하게 자신의 타이밍으로 치기 위해서는 먼저 폼이 안정되어야 한다. 수비할 때도 상대적으로 느린 공을 잡을 때는, 안정된 포구 자세를 취하고 나서 글러브로 잡게 된다. 몸에는 스스로 기억하는 장치가 내장되어 있다. 연습할 때 정확한 폼으로 하다보면 실전에서도 몸은 그대로 반응한다. 야구는 ‘폼생폼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유희관의 느린 공과 김성근 감독을 빗대어 빠름과 느림을 논했지만, 정답은 없다. 하루가 정확히 24시간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하루의 길이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게 인생이고,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이다(개인적으론 빠름보다 느림에 마음이 더 기운다). 사실 느림의 상징인 유희관도 알고 보면 빠르다. 그는 몸을 최대한 끌고 나와 던지고, 릴리스포인트도 최대한 숨긴다. 그래서 타석에 타자가 느끼는 체감 속도는 실제 구속을 능가한다. 전광판에 찍히는 구속이 전부가 아니다.
나무의 나이테는 빠르고 느린 생장이 서로 어울린 흔적이다. 계절에 따라 세포 분열의 속도가 달라 나이테가 생기는데, 영양이 풍부한 여름에는 많이 자라고 겨울이 오면 성장이 더뎌지며 동심원 모양의 테를 갖게 된다. 신영복 선생은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가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이다”라고 했다. 느리다고 해서 자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느림은 성장과 변화의 다른 형태일 뿐이다. 한 템포 늦었지만, 오랜 기간 편견과 싸우며 희망을 던지고 있는 유희관의 7년 연속 10승 기록을 축하한다.
kenny@sportsseoul.com
기사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