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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킴의 첫 앨범 ‘고래의 꿈’이 태어난 지 올해로 꼭 10년이 되네요.”
오스카 엔터테인먼트(이하 오스카)의 전홍준(50) 대표는 감회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바비와 저, ‘고래의 꿈’과 오스카는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지요. 바비는 ‘고래의 꿈’을 통해 뮤지션으로 다시 태어났고, 오스카도 ‘고래의 꿈’을 발판 삼아 이만큼 성장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현재 오스카에는 바비킴을 포함해 부가킹즈, 더블케이, 길학미, 3인조 여성 보컬 러쉬. 감성파 남성 듀엣 조이어클락 등이 소속돼 있다. 규모 면에서는 국내 빅3 가요 기획사인 SM, YG, JYP엔터테인먼트 등에 처지지만, 내실은 어떤 기획사보다 탄탄하다. 특히 음악성을 갖춘 뮤지션의 산실로 유명하다는 점에서 뚜렷하게 차별화된다.
내년 초 오스카는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음악적 실력과 대중성, 그리고 색깔 있는 개성까지 겸비한 신개념 아이돌 그룹을 대중 앞에 전격적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고래의 꿈’ 이후 새로운 10년을 위한 터닝 포인트를 야심 차게 준비하고 있는 오스카, 전홍준 대표를 만났다.
-오스카라는 네임이 눈에 띕니다. 이름에 얽힌 뒷얘기가 있는지요
오스카는 제 영어 이름이에요. 우리말이 다소 서툴렀던 가수 윤미래와 힙합 뮤지션들과 좀 더 친해지고 싶어서 영어 이름을 지었죠.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구해낸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의 삶을 다룬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감명깊게 봤고, 오스카에서 풍기는 비즈니스맨의 뉘앙스가 마음에 들었어요. 나는 음악으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라는 뜻에다 앞으로 오스카 엔터테인먼트를 좋은 기획사로 키워내고 각종 가요상을 많이 받고 싶은 욕심 등을 골고루 담은 이름이죠. ‘전홍준 대표님’이라는 호칭보다는 뮤지션들에게 격의 없이 ‘오스카~’로 편안하게 불리는 게 더 좋기도 했고요.
-대기업 사원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가요계에 어떻게 발을 들여놓게 됐습니까
단국대학교 화학과를 나왔는데 1991년 졸업 후 쌍용정유에 입사했어요. 그런데 전남 여수시 여천 화학단지에 내려가서 근무해야하는 상황이었죠. 서울을 훌쩍 떠나서 지방에서 근무하는 게 망설여지던 차에 절친한 친구인 작곡가 하광훈이 어느 날 ‘너, 매니저 한 번 해볼래?’라고 권유하더군요. ‘그게 뭔 데?’라고 대뜸 대꾸할 정도로 당시만 해도 가요 매니저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을 때였어요. 평소 음악을 좋아했기에, 진짜 얼떨결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이 길에 들어서게 됐지요.
-하광훈 작곡가와 동창 사이입니까
네.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생인 죽마고우예요. 같은 동네(상도동)에 살기도 했고요. 그룹 다섯손가락의 첫 앨범이 나오기 전 연습생 시절 멤버가 제 친구들이죠. 당시 하광훈이 베이스를 맡았고, 보컬은 최호섭이었어요. 다섯손가락이 정식 데뷔하기 전에 최호섭은 솔로로 나서서 ‘세월이 가면’을 히트시켰죠. 최호섭이 나간 후 보컬을 임형순이 했고, 히트곡 ‘새벽기차’가 나왔죠. 중앙대학교 작곡과에 진학한 (하)광훈이는 신곡을 쓸 때마다 제게 모니터링을 부탁했는데 변진섭의 ‘홀로 된다는 것’도 아마 제가 가장 먼저(?) 들었을 거예요. 어쨌든 그때부터 곡을 듣고 판단하는 능력이 조금씩 키워졌던 것 같아요. ‘이 곡은 가사가 잘 안 들려’, ‘노랫말이 요즘 스타일이 아닌 것 같다’, ‘후렴구가 귀에 쏙 들어오지 않고 겉도는 느낌인데’ 등의 조언을 해줬고, 광훈이는 제 얘기를 잘 귀담아 들어줬어요.
-하광훈 씨가 모니터링을 부탁했을 정도라면 듣는 귀가 남달랐던 모양입니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어요. 서울대 중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큰 형과 같은 방을 썼는데 매일 아침밥 먹을 때마다 형이 팝송을 틀어놨어요. 벽면 한가득 엘피(LP)판이 가득했지요. 잠 잘 때도 팝송이나 가요를 자주 들었고요. 초등학생 때부터 음악을 접했고, 중학교 시절에는 하교해 1시간가량 음악을 듣고 난 후에야 공부를 시작했어요.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저는 사춘기를 음악으로 극복했던 것 같아요. 돌이켜 보면 그때 그 시절에 접했던 수많은 음악이 지금 이 길을 걷는데 여러모로 자양분이 된 듯해요.
(하)광훈이의 권유로 가요 일을 처음 시작했는데 사실 잘 안됐어요. 91~93년까지 서울 강남 역에 레코딩 스튜디오 사업을 구상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이승철이 히트곡 ‘방황’으로 인기였을 때 전국 투어 스태프로 잠깐 참여했었죠. 광훈이가 주로 일했던 서울 장충동 스튜디오에는 밤낮없이 찾아갔어요. 거기서 스타 가수들이 녹음하는 과정을 많이 봤지요. 그러면서 앨범의 히트 요인 분석법을 알게 모르게 배웠던 것 같아요.
-가요 매니저먼트 일은 언제부터 시작하게 됐습니까
1993년 5월에 유열 매니저로 발을 들여놨죠. 당시 KBS1 ‘열린음악회’가 눈에 딱 들어오더라고요. 다음날부터 ‘열린음악회’ 팀에 매일 가서 유열의 피알(PR)을 시작했고, 한 달에 한 번씩 출연시키면서 성악과 크로스오버 등을 했어요. 그때 유열 신효범 조영남 박정운 박미경 등이 전국의 행사를 도맡다시피 했는데 그러다 하광훈이 제작한 조관우의 리메이크 앨범 2집을 만났죠. 랩이 들어간 새로운 스타일의 ‘님은 먼곳에’를 포함해 ‘꽃밭에서’, ‘모래성’ 등이 있는 앨범이었는데 ‘초대박’이 났어요. 5년 이상 꾸준히 팔려 총 450만장이 나갔거든요. 아마 단일 앨범으로 총 누계를 따지면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렸을 거예요. 매일 5000장씩 나갔지요. 그런데 90년대 후반 IMF가 터지고 앨범 2장을 냈다가 망하면서 암흑기 같은 3년을 보냈어요. 돈은 없고 집안 가재도구를 중고시장에 내다 팔고 월세를 전전했죠.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었고 그동안 내가 소홀했던 부분을 복기하며 자기 반성을 많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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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킴을 만난 건 언제였습니까
‘남을 탓하지 말자. 현재의 나는 내가 만든 거다’라는 생각으로 재기를 노리던 차에 MBC 라디오 모 국장님이 가요기획사 월드뮤직에 홍보이사로 추천해줬어요. 그때 만난 가수가 19살 윤미래였죠. 한마디로 예술이었어요. 랩, 노래, 보컬 톤이 진짜 예뻤거든요. 발라드 가수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작업한 끝에 ‘시간이 흐른 뒤에’라는 곡이 탄생했죠. 2001년 서울 대학로에서 윤미래의 첫 공연을 하는데 게스트로 드렁큰타이거, 리쌍, CB매스, 부가킹즈 등 힙합 뮤지션이 대거 출연했고, 거기서 운명(?)처럼 바비킴을 만났어요. 윤미래와 듀엣곡을 불렀는데 ‘저 친구 누구냐?’라는 말이 절로 나왔어요. 독특한 음색이 마음에 들었고 앞으로 힙합 요소가 들어간 가요가 히트할 거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바비킴과 소주 한잔 하면서 많이 친해졌고, 바비킴이 속한 그룹 부가킹즈가 당시 기획사와 계약기간이 끝난 후 연락을 해 의기투합했지요. 월드뮤직이 부도난 후 호주머니에 가진 게 없어서 아르바이트로 돈이 생기면 녹음하는 식으로 2003년부터 14개월 동안 고생한 끝에 ‘고래의 꿈’이 세상에 나왔어요.
-‘고래의 꿈’이 히트한 요인은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바비킴에게 발라드 앨범을 내자고 했더니 ‘아 유 크레이지? 아임 래퍼’라고 하더군요. 이에 저는 ‘음악은 개성이다. 톤 싸움이다. 너는 목소리 톤이 독특하고 좋다. 망하면 내가 망하는 거다. 걱정하지 말고 한 번 해보자!’라고 설득했어요. ‘고래의 꿈’은 거친 듯하면서 솔직한 노랫말을 추구했고 힙합이면서 랩 부분을 멜로디로 바꾸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어요. 그때만 해도 발라드곡의 가사는 대부분이 말랑말랑한 내용이었죠. 거칠고 솔직한 노랫말이 들어간 발라드는 거의 없었어요. 이런 점에서 ‘고래의 꿈’이 신선한 평가를 받았고, 무엇보다 바비킴 만의 독특한 보컬이 가요 팬들에게 어필했다고 봐요. 힙합 팀인 무브먼크 크루와 윤미래 등이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고요. 덕분에 ‘고래의 꿈’은 당시 10만장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히트 쳤고, 지금의 바비킴과 오스카 엔터테인먼트를 만든 든든한 토양이 됐어요. 지난 8월 6일이 ‘고래의 꿈’이 나온지 딱 10년이 된 날이었어요. 이 앨범 망하면 바비킴이 다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간다고 했는데 11년 무명생활을 털고서 아직 한국에서 건재하게 활동하고 있네요.
-오스카 엔터테인먼트가 추구하는 음악과 뮤지션은 어떤 겁니까
개성있는 뮤지션, 진정한 싱어를 원해요. 2시간 동안 공연이 가능하고 엔터테이너가 아닌, 노래로서 많은 이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가수를 발굴하고 만들어내는 게 오스카의 목표예요. 감성없이 노래하는 가수는 사절입니다. 노래를 좀 못해도 창법이나 기교가 다소 부족해도 영혼이 담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가수 지망생을 찾아내는 일이 제가 할 일이지요. 그런 점에서 바비킴을 포함해 윤미래, 조관우, 더블케이, 심수봉 등은 오스카 스타일과 맞닿아 있는 뮤지션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무대에 섰을 때 안심이 되는 가수, 필(느낌)이 충만하고 영혼으로 노래를 소화할 줄 아는 뮤지션이 바로 오스카의 색깔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대중성은 쉽게 포기할 수 없을 텐데요
물론 대중성을 확보해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저는 ‘내가 잘하는 거를 하자! 돈을 좇기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잘하는 것을 하자!’는 게 원칙이에요. 하루 세끼 밥 먹고 사는 것은 돈을 많이 벌든 적게 벌든 같더라고요. 마음 불편하게 ‘고기’를 먹기보다도 마음 편하게 서로 통하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김치찌개’를 먹고 싶은 게 오스카의 마음입니다. 회사 이미지와 맞지 않은 가수를 영입해 돈만 좇는 느낌은 싫어요. 솔직히 제가 성격이 좀 까칠한 편이에요. 가수들과 얘기할 때 저는 스스럼없이 솔직한 돌직구를 날리는 스타일이죠. ‘살 빼라, 노래 연습해라’ 등 당장 듣기 싫은 독설을 가수들에게 퍼부어요. 회사 스태프 등 식구들이 소속 가수가 어려워서 못하는 것들을 정확하고 솔직하게 짚어주는 게 제 할 일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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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 대중가요시장의 문제점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너무 양극화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봐요. 전 세계적으로 K팝이 인기이긴 하나 아이돌 그룹에 편중해 있고, 음악의 다양성이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과거 가요 프로그램을 보면 트로트, 발라드, 힙합, 록, 아이돌 위주의 댄스 등이 고르게 있었는데 지금 가요 시장은 아이돌에게 지나치게 쏠려있어요. 가요의 다양성이 심각하게 훼손되면 가수 뿐만 아니라 유통사, 방송국, 제작자, 대중 모두에게 득이 될 게 없다고 봐요. K팝 한류가 시들해지면 우리 가요시장이 과연 어떻게 될까요?
-아이돌 편중화 현상의 주요 원인은 뭘까요
요즘 가요 팬들은 음원 다운로드를 거의 받지 않아요. 팬덤 외에 CD를 사는 소비자도 많이 줄었고요. 대부분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소비하는데 스트리밍 1곡당 제작자에게 2원 5전이 생깁니다. 1000만 명이 스트리밍하면 2500만 원이 들어오는 거죠. 뮤직비디오 한 편 제작비가 억 대가 훌쩍 넘어가는 형편임을 고려하면 음반 제작자가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인 겁니다. 수익의 상당 부분이 유통사 몫이니까요. 제작자의 수입이 없으니 선순환이 안 되고, 국내 팬덤 시장과 K팝에 의한 해외 시장, 그리고 행사 및 다양한 MD 상품 판매 등에서 유리한 편인 아이돌 가수 발굴과 음반 제작 등에 치중할 수 밖에 없는 거죠.
아이돌 가수들이 많아지면서 포화 상태가 됐고,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좀 더 자극적인 콘셉트와 퍼포먼스에 치중하게 되고, 결국은 음악의 질이 저하되는 경우가 잦아진 겁니다. 슬픈 현실이죠. 디지털 시대에 아무리 곡이 히트해야 2~3개월 만에 끝나는 상황에서 소위 ‘국민 가요’는 실종된지 오래 됐어요. 대중음악산업을 장기적으로 보호· 육성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음원, 음반 수익구조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마땅합니다. 제작자가 사라지면 K팝의 미래는 없다고 봐요. MBC ‘나는 가수다’, KBS2 ‘불후의 명곡’ 등이 반향을 일으키는 것은 진정한 음악의 힘입니다. 다양한 음악을 접하고 감동을 느끼는 시장이 더욱 활성화해야 합니다. 물론 아이돌 음악 시장도 지금보다 더욱 활성화해야겠지요.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은 채 골고루 성장하는 게 바람직하죠.
-이런 가요계 상황에서 오스카가 계획 중인 돌파구가 있습니까
내년 상반기에 힙합 느낌이 강한 아이돌 팀을 론칭할 계획이에요. 음악성과 대중성을 겸비하고 피아노, 댄스, 랩, 보컬 등 다재다능한 친구들로 구성된 남자 6~7인조 그룹을 기획하고 있어요. 아이돌을 기획할 수밖에 없는 가요계 현실에 오스카 엔터테인먼트의 지향점이 만나서 탄생하는 팀입니다. 연습기간만 2년이 넘었어요. 바비킴은 일본과 중국 시장에서 점차 좋은 반응을 얻고 있어요. 바비킴이 부른 드라마 OST 수록곡이 15곡이나 되니까 해외 시장에서 러브콜이 많이 들어옵니다. 코러스 출신 여성 3인조 보컬 러쉬는 중국어를 체계적으로 공부한지 1년이 넘었어요. 내년에 중국 시장에 꼭 진출할 겁니다.
김용습기자 snoopy@sportsseoul.com
사진│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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