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글.사진 | 영월군 = 이주상 기자]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키며 정권을 잡았다. 전두환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같은 해 12월 12일 12·12사태를 촉발하며 정권을 잡았다. 모두 정당성을 잃은 채 총으로 정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쿠데타로 인한 직접적인 희생자는 많이 발생하지 않았다. 12·12사태 때 김오랑 소령이 참모총장 공관을 지키다 쿠데타군의 총탄에 희생됐을 정도였다.

먼 옛날도 그랬을까? 조선 7대 임금 세조(1417~1468)는 정권을 잡기 위해 무려 264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우리가 잘 아는 사육신을 비롯해 수많은 인사들을 무참히 희생시켰다. 작은아버지인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1441~1457)처럼 우리 역사에서 비극적인 인물은 없다. 단종은 아버지인 문종(1414~1452)이 잦은 병치레로 재위 2년 만에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지만,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3년 만에 왕위를 빼앗겼다. 가장 믿었던 삼촌인 수양대군이 강압적으로 왕위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264명이나 희생됐다.

한국 역사상 가장 잔인한 임금으로 세조를 꼽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피를 나눈 조카를 죽이면서까지 정권을 찬탈한 야수 같은 인물이다. 단종의 비극은 유배간 강원도 영월에서 종지부를 찍는다. 복위 운동에 초조해진 세조가 어린 조카를 무참히 살해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국민이 읊조리는 왕방연(단종의 유배를 수행한 금부도사)의 시조인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빔길 예놋다’도 단종의 비극을 그린 노래다. 고독 속에 지낸 단종은 16살에 죽임을 당하며 비통한 생을 마쳤다. 단종의 비극이 서린 청령포와 장릉은 수백 년이 지났지만,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슬픔이 너무나도 가혹하고 아프기 때문이다.

청령포 : 단종의 거처를 향해 고개를 숙인 소나무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있는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 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그곳에 살았음을 말해 주는 단묘유지비와 어가,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한양에 남겨진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쌓은 돌탑, 외인의 접근을 금하기 위해 영조가 세웠다는 금표비가 있다.

또한 단종의 유배처를 중심으로 주위에 수백 년생의 거송들이 울창한 송림을 이루고 있는데, 특히 천연기념물인 관음송은 단종이 걸터앉아 말벗을 삼았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다. 관음송은 수령 600여 년 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소나무이다.

청령포는 워낙 지세가 험하고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단종이 이곳을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표현했다고 전한다. 고증을 통해 지어진 집은 지난 2000년에 세워졌다. 이후 신묘한 일이 벌어졌는데, 집 앞의 소나무가 시간이 흐르면서 집을 향해 절하듯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다. 고개 숙인 소나무의 모습은 관람객에게 아련한 슬픔에 젖게 만들고 있다.

장릉 :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조선 임금의 능

장릉은 단종의 무덤으로,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장릉 주위의 소나무는 모두 능을 향해 절을 하듯 살짝 굽어있다. 단종은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16세에 죽임을 당했다.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영월의 호장 엄흥도가 몰래 수습하여 동을지산 자락에 암장하였다. 오랫동안 묘의 위치조차 알 수 없다가 1541년(중종 36)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이 묘를 찾아내어 묘역을 정비하고, 1580년(선조 13)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 등을 세웠다. 1681년 17대 임금 숙종에 의해 단종은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되고, 1698년(숙종 24) 11월 단종으로 추복되었으며, 능호는 장릉(莊陵)으로 정해졌다.

장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석물 또한 단출하다. 봉분 앞에 상석이 있고, 상석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서 있다. 그 아랫단에 사각형 장명등과 문인석·석마 각 1쌍이 있으나 무인석은 없다. 묘가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는 단종을 위해 순절한 충신을 비롯한 264인의 위패를 모신 배식단사,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의 정려비, 묘를 찾아낸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낙촌기적비, 정자각·홍살문·재실·정자 등이 있다. 왕릉에 사당·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장릉뿐인데 이는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은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장릉은 다른 조선 임금의 묘와 달리 서울에서 먼 영월에 있다. 단종이 영월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역적 신분이어서 그대로 방치되다 숙종이 복위하면서 왕릉의 모습을 갖췄다. 하지만 언덕 위의 묘역은 옮기지 않았기 때문에 일자(一字)형의 다른 임금의 묘역과는 상이한 모습(역 ‘ㄱ’자)을 갖게 됐다. 장릉 인근에 있는 단종 역사관에는 단종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대기를 기록한 사료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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