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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스포츠서울 윤세호기자] “감독이 야구를 하는 게 아니다. 코치도 아니다. 야구는 선수가 한다. 늘 선수를 생각했고 선수도 사람임을 명심했다.”
16년 동안 우직하게 한 길을 걸으며 정상에 올랐다. 엘리트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늘 진실했고 절실했다. 배움의 자세를 통해 최신식 데이터를 습득하면서도 야구에는 결국 사람이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20대에 방출 통보를 받고 만 30세부터 코치를 맡은 NC 이동욱 감독이 고진감래 끝에 신생구단 신화를 이룩했다.
코치 시절부터 진가를 발휘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구단 내부에서는 모두가 인정하는 숨은 공로자였다. 만 29세였던 2003년 프로 7년차에 유니폼을 벗은 이 감독은 롯데와 LG 2군을 거쳐 NC에서 특급 수비코치로 자리매김했다. 절차탁마한 결과였다. LG 2군 시절 코칭스태프로 함께 한 차명석 LG 단장, 허문회 롯데 감독, 김정민 LG 배터리 코치 등과 함께 야구 스터디 클럽을 결성해 공부하는 지도자의 시초가 됐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 감독은 DER(디펜시브런세이브), UZR(얼티밋존레이팅)과 같은 수비 지표를 인지함과 동시에 선수 멘탈 케어에 집중했다.
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비다. 수비가 약한 팀은 절대 상위권에 오를 수 없다. 홈런과 안타, 150㎞ 강속구처럼 한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수비가 부실하면 언제든 무너진다. NC가 신흥강호로 올라선 비결도 이 감독이 설계한 단단한 수비에 있다. NC는 촘촘한 내외야진을 구축했고 실수를 최소화하며 1군 무대 2년차부터 포스트시즌에 올랐다. 플라이볼 공포증에 시달렸던 박민우를 국가대표 2루수로, 투수였던 나성범을 국가대표 외야수로, 미완의 대기였던 노진혁을 주전 유격수로 올라서게 한 데에는 이 감독이 수비코치를 맡아 고민하고 지도한 흔적이 자리하고 있다.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다른 지도자들보다 선수와 사람에 집중했다. 이 감독은 “감독이 야구를 하는 게 아니다. 코치도 아니다. 야구는 선수가 한다. 늘 선수를 생각했고 선수도 사람임을 명심했다”고 자신의 지도철학을 설명했다. 이어 그는 “감독이 되고 나서는 선수들과 스킨십이 많이 줄기는 했다.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경기 후 모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도 작년까지는 이따금씩 선수를 따로 부르거나 연령대별로 모아서 맥주 한 잔씩 했다”며 “코치 때 그랬던 것처럼 감독이 되서도 선수들이 편하게 다가오게 하고 싶었다. 선수가 부진하거나 실수하면 문자로 ‘실수는 실패가 아니다’고 보냈다. 나는 성공하지 못한 선수였지만 못했을 때 누군가의 말 한 마디, 문자 한 마디가 힘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지도자로서 그런 부분을 꼭 챙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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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황무지였다. NC가 태동한 2011년 10월 10일 강진캠프에서는 모두가 무명이었다. 이 감독도 1군 지도자 경험이 전무한 알려지지 않은 수비 코치였다. 지난 24일 창원 LG전에서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지은 이 감독은 9년 전을 돌아보며 “정말 열악했다. 선수들이 맞거나 다칠까봐 매일 돌멩이부터 주웠다”며 “열악한 환경에서도 몇 박스씩 펑고 치고 선수들 수비 훈련시켰던 기억이 난다. 당시 감독님, 코치님들, 선수들과 지금까지 긴 시간을 함께 해온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고 미소지었다.
강진캠프 명단에는 현재 NC 1군 엔트리에 포함된 나성범, 박민우, 노진혁, 강진성, 원종현, 김진성, 이상호가 있다. 이 감독 또한 수비코치로 이름을 올렸다. 당시에는 누구도 이들을 알지 못했지만 9년 후 이들은 144경기 대장정 주인공으로 우뚝 섰다.
bng7@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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