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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조은별기자]“어찌,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영화 ‘관상’(2013)에서 수양대군 역의 이정재가 당대 천재 관상가 내경(송강호 분)에게 물었던 대사가 10년 뒤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배우 이정재(50)는 요즘 ‘지천명 아이돌’이란 애칭을 실감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게임’으로 월드스타로 발돋움한데 이어 최근에는 자신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헌트’의 개봉을 앞두고 홍보 일정으로 숨 돌릴 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여기에 ‘헌트’에 함께 출연한 동료배우 정우성과 매니지먼트사 겸 제작사 아티스트컴퍼니를 운영하는 등 1인 3역을 소화하고 있다 그야말로 한국 엔터테인먼트계를 대표하는 왕같은 인사가 된 셈이다.
최근 종로구 삼청동에서 만난 그는 “왕이 되고 싶었는데 ‘오징어 아저씨’가 됐다”라며 “잊히는 배우가 되고 있었는데 ‘오징어게임’으로 인해 젊은 분들은 물론 해외에서도 알아봐주는 계기가 됐으니 내게는 아주 큰 행운”이라며 웃었다.
이어 “‘헌트’에 호평이 쏟아져 ‘고스트 감독’이 있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까지 돈다”는 농담섞인 칭찬에 “정말 그런 분이라도 계셨으면 이렇게 고생하지 않을텐데”라고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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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가 직접 각색, 연출, 출연하고 공동제작까지 한 영화 ‘헌트’는 지난 5월 열린 75회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돼 호평받았다. 하지만 이정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영화제에서 다소 부족하다고 지적받았던 부분을 기억했다가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각색작업부터 시작했다. 귀국 뒤에는 편집실에 틀어박혀 재편집에 공을 들였다. 카메라 앞에서 수트 핏을 뽐냈던 그가 마치 ‘오징어게임’의 성기훈처럼 트레이닝복에 까치집 머리를 한 채 편집기 앞에 앉아있다니, 이 또한 ‘헌트’의 이중첩자같은 이중생활이 아닐 수 없다. 어찌보면 그의 삶 자체가 영화같기도 하다.
왜 이렇게까지 사서 고생했을까. 이정재는 “처음 한재림 감독이 죽이는 대본이 있다며 ‘남산’(‘헌트’ 원제) 얘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기대가 컸다”고 털어놓았다.
“‘관상’을 마치고 몇 개월 뒤 한재림 감독이 ‘선배님 스파이물 좋아하냐’며 저녁이나 먹자고 했다. 남자 배우치고 근사한 스파이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내게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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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프로젝트는 무산됐다. 각색된 3고를 본 한 감독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며 연출을 포기했다. 내심 아쉬워했던 이정재는 2년 뒤 다른 지인을 통해 ‘남산’ 시나리오가 아직 충무로에서 떠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시나리오를 꼼꼼히 읽어보았다.
“당시만 해도 잘 수정하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게 고생문이 열린 거였다.”
각색을 할 작가를 찾지 못해 결국 직접 펜을 들었다. 이메일 몇 줄 밖에 쓰지 못했던 그가 노트북 앞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몇몇 감독에게 연출을 의뢰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80년대가 배경인 영화 내용이 2022년과 시의성이 맞지 않아서, 예산이 맞지 않아서 등등 이유는 다양했다.
“무엇보다 나는 우성 씨와 이 작업을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남자 주연 투톱 구조가 돼야 하는데 연출을 의뢰했던 감독님들 모두 남성 투톱이라는 점에 난색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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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고초려’ 끝에 절친 정우성을 주연으로 모실 수 있었다. 이정재는 “각색, 연출, 제작 중 가장 어려운 건 제작이었다”며 “다행히 사나이픽쳐스 측이 상당 부분 제작을 맡아줘 다소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영화 내용은 예민하고 민감하다. 80년대 군부정권의 안기부, 아웅산테러 사건 등 당시 시대상을 비교적 탄탄한 이야기 구조 속에 담아냈다. 이정재는 “메시지가 극명한 영화는 관객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 두 인물에 집중했다. 이정재와 정우성이 연기적으로 부딪히며 긴장이 발생하고 폭발할 것이라 여겼다”고 설명했다.
신인감독으로서 보기 드문 냉철한 판단은 이정재가 30년 동안 호흡했던 한국의 작가주의 감독들의 영향이다. 이정재는 “배창호 감독님은 내가 지금까지 작업한 감독님 중 가장 열정적인 분이다. 박광수 감독님과 변혁 감독님은 섬세하고 예술적인 분이다. 황동혁 감독님과의 작업도 특별했다. (김)성수 형은 나를 징글징글하게 찍었다. 그런 기억들이 내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털어놓았다.
이정재는 쉴 틈이 없다. ‘헌트’ 홍보를 마친 뒤에는 다음 달 12일 열리는 에미상 시상식을 위한 ‘오징어게임’ 알리기에 돌입한다. ‘오징어게임’은 남우주연상을 비롯, 13개 부문 14개(남우조연 2인)에 노미네이트됐다. 한국 드라마 사상 역대 최고 기록이다. 그는 “‘오징어게임2’는 내년 가을 무렵 촬영을 시작할 것 같다”며 “작품에 공을 들인 많은 이들이 함께 시상식에 참여하게 된 게 가장 기쁘다”고 함박 웃음을 지었다.
mulgae@sportsseoul.com
사진제공|메가박스 중앙(주)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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