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장강훈기자] 오전 6시32분. 요란한 위급재난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경계경보가 발령됐으니 대피할 ‘준비’를 하라는 내용. 동시에 항공기(여객기)가 이륙하는 소리가 날아들었다. 미확인 발사체가 날아드는 데 여객기가 정상적으로 이착륙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잘못 전파된 내용으로 인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 9분 뒤 ‘오발령’이라는 안내 메시지가 다시 울렸다.
밤사이 월드클래식(WBC) 대표팀이 대회 기간 중 밤새 술을 마셨고, 때문에 졸전을 거듭했다는 식의 보도가 야구판을 흔들었다. 군사정권시절 무용담처럼 전해진 ‘예보된 비가 취소돼 낮경기를 시작했는데, 양팀 선발투수와 포수, 심지어 심판까지 술냄새가 나서 경기를 2시간 30분만에 끝냈다. 더그아웃 뒤에 짬뽕 그릇이 수북이 쌓였다’는 얘기가 21세기에 재현된 것처럼 보였다.
정오에 플레이볼이고, 투수 전원대기 상태였는데 밤새 술을 마셨다는 건 상식적이지 않다. 야구 인기회복이라는 사명감에 짓눌려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하던 대표팀 선수들의 표정을 떠올리면 앞뒤가 맞지 않는 그림. 심지어 일본에는 밤새워 영업하는 집을 찾기 어렵다. 셔터를 내리고 밤새워 술을 마셨다면? 목격자가 있는 게 이상한 일이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많은 선수가 진실게임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한 구단 핵심 관계자는 “WBC는 실력이 떨어져 패한 것”이라며 “술 때문에 이길 경기를 놓쳤다는 건 난센스”라고 꼬집었다. 또다른 구단 핵심 관계자 역시 “해당 업소에서 공짜로 술을 마시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카드결재 내역 등을 확인하면 사실여부가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술을 마실 수는 있다. 시점이 언제인지가 쟁점’으로 몰린다.
오전 10시 서울서부지방법원. 학교폭력 등에 관해 재판에 넘겨진 이영하(26·두산)가 10개월여간 지루한 법정공방 끝에 무죄 선고를 받았다. 전기파리채에 손가락을 집어넣게 하고, 굴욕적인 별명과 율동을 강요하고, 라면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병뚜껑에 한 시간가량 머리박기를 시켰다는 피해자 주장은 단 하나도 입증하지 못했다. 이른바 ‘미투열풍’과 여자배구 쌍둥이 자매의 학폭 가해자 이슈와 맞물린 지 3년여 만에 ‘아닌 것’으로 일단 결론이 났다.
‘스키마(schema)가 형성된다’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는 정보를 통합하고 조직화하는 인지적 개념이다. ‘학폭’ ‘음주’ ‘야구선수’ ‘대표팀’ 등의 키워드가 한번에 날아들면 “또 사고 쳤네” “야구선수들은 늘 문제야”라는 스키마가 형성된다. ‘프로야구 선수는 사고뭉치’라는 확증편향을 가진 사람들은 이미 진실에 관심이 없다.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반대의견은 배척하기 때문에 “절대 아니다”라는 선수들의 말에 귀를 닫는다.
하지 않은 일을 증명해야 하는 것만큼 당혹스러운 일도 없다. 언론이 확대 재생산해 사실인 것처럼 몰아가면, 대중은 훗날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무관심하다. 가해자 없이 억울한 피해자만 양산하는 악순환의 반복이다.
‘프로야구 선수의 일탈’은 대중에게 섹시한 화두다. 그 참을 수 없는 유혹에 스키마가 형성되면 진실은 사라지고 소문만 눈덩이처럼 커진다. 이영하 변호를 맡은 김선웅 변호사는 “알려진 인물이라는 이유로 입증되지 않은 사실로 피해당할 위기에 몰렸을 때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중재기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zzang@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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