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1979년 12월 12일, 19세 김성수는 집 앞에 나갔다가 서울 한남동 인근에서 우연히 총성을 들었다. 육군참모총장 공관이 직선으로 보이는 집 근처였다. 장갑차가 눈앞에서 지나다녔다. 서울 한복판, 호기심 많은 청년은 총소리가 난 곳을 향해 달려갔다.

한참을 달리다 이태원 인근 육교에 올랐는데 군인이 막았다. 그 순간 또 총소리가 났고, 군인들은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청년 김성수는 앉은뱅이로 걸어 돌아갔다.

벌써 44년이 지난 일인데 김성수 감독은 아직도 어제 본 것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의 기억 때문에 12.12 군사반란에 있어서는 전문가 수준의 이해도를 가졌다. 덕분에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던 12월 12일 그날 이야기가 ‘서울의 봄’이란 제목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황정민이 전두광이란 이름으로 머리는 물론 온몸이 반짝이는 연기를 선보였고, 정우성은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을 맡아 대척점을 이룬다. 군인의 승리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사건은 영화에서 선과 악이라는 외피를 쓰고 스포츠 경기의 구도를 가진다.

◇“욕심을 끌고 오는 탐욕 VS 서서히 빠져나가는 명분”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쿠데타는 역사에 12.12사태로 기록됐다.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근현대사를 시각화할 필요가 있느냐는 우문에 답하듯 ‘서울의 봄’은 박진감으로 승부한다. 12일부터 13일 새벽까지, 9시간 동안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을 촘촘하게 배치했다. 다수의 인물이 등장하고 복잡하게 상황이 돌아가지만,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근현대사 정치를 다루는건 예민하게 접근해야 한다. ‘그때 그 사람들’, ‘변호인’ 등의 제작 관계자들은 보이지 않는 세력과 지난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런 두려움은 없었어요. 다만 이름을 바꾸는 것에서는 고민이 있었죠. 첫 시나리오는 다큐멘터리 수준의 사실이 잘 나열돼 있었어요. 저는 욕망의 드라마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름을 바꾸니까 자유로워지더라고요. 전두광이나 이태신, 노태건과 같은 이름은 제작진 투표로 결정됐어요. 전두광은 압도적인 표를 받았어요.”

영화가 언론시사회를 통해 공개한 후 평단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첨예한 대립이 있는 정치적 사건이 소재라 호불호가 갈릴 법 하지만 검증된 ‘김성수 표 영화’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는다. 김 감독은 부끄럽다는 듯 손사래부터 쳤다.

“친척들에게 칭찬받는 느낌이었어요. 처음 영화를 만들 때는 젊은 관객들이 재밌게 봐줄까 걱정이 많이 됐어요. 너무 옛날얘기기도 하고, 과연 흥미를 가질까 싶었죠. 비극이기도 하고요. 영화는 재미가 있어야 하잖아요. 정치적인 걸 넘어서서 재밌게 다가가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왜 굳이 12.12 군사 반란을 끄집어낸걸까. 알려졌기도 많이 알려졌고, 굳이 극화를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워낙 예민한 소재라서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도 어려울 수 있었다.

“욕망에 대한 이야기라서요. 이 사건은 비단 이날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제가 이 나이 먹도록 이런 일들을 많이 봤어요. 우리 생활에도 욕망 덩어리들이 많죠. 승자들 사이에서도 의심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그런 일들이 있었을 것 같았어요. 앞으로 우리 나라도 여러 중요한 모멘텀이 있을 거고 결정적인 판단을 해야해요. 모든 일들이 꼭 지혜와 안목으로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경종을 알리고 싶었어요.”

◇“1초만에 승낙한 황정민 VS 고사를 거듭한 정우성”

황정민과 정우성은 역대급 연기를 펼쳐 보인다. 전두광으로 분한 황정민은 묘한 매력을 담아낸다. 실존 인물과 비슷한 듯 아닌 듯 경계 지점에서 우뚝 선다. 평소 연기를 잘하는 배우로 유명하지만, 착장을 완전히 바꾸고 등장한 ‘서울의 봄’은 그의 연기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아수라’하면서 정민씨 연기 능력에 정말 감탄했어요. 그리고 연극 ‘리처드3세’를 봤어요. 셰익스피어가 쓴 인물 중 가장 사악하고 내면이 뒤틀린 인물을 멋있게 연기했죠.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을 때 다시 공연이 열렸고, 그때 부탁했죠. 당연히 고민할 줄 알았는데 1초만에 승낙했어요.”

정우성은 과묵하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욕망에 가득찬 군인들과 대척점에 선다. 품위 있게 지조를 지킨다. 앞서 정우성은 영화 ‘헌트’에서 김정도 역을 맡아 신군부 세력과 다툰 적이 있다. ‘헌트’와 비슷한 지점이 있다는 이유로 정우성은 여러 차례 고사했다.

“안 한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계속 요청하면 해줄 것 같더라고요. 저희 세대에도 근사한 어른들이 많았어요. 잔정이 있거나 표현이 많지는 않지만, 의리가 있으면서 자상한 분들이 있었어요. 그런 아버지를 소환해서 이태신에게 부여했죠. 올곧은 신념을 가진 군인, 정우성만한 배우가 없죠.”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인물의 매력은 오히려 신군부에 쏠린다. 욕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며 달려가는 모습이 어쩌면 관객의 속마음을 건드릴지도 모른다. 단단하고 우직한 이태신보다는 본능에 충실한 전두광이 차라리 더 인간적일 수 있다.

“물론 그럴 수 있어요. 멋있는 악당은 제가 걱정한 부분이기도 해요. 그래도 대전제는 군인의 총칼이 누구에게 향해야 되냐는 거죠. 군인은 우리 나라를 위해서만 사용해야 한다는 대전제를 지켜야 해요. 개인의 욕망과 영달을 위해서는 안 되는 거죠. 이태신이 바보같더라도 움직이지 않잖아요. 그게 진짜 군인이라고 생각해요.”

intellybeast@sportsseoul.com

기사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