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파리=김동영 기자] “제가 센강을 헤엄친 최초의 한국인입니다.”
양팔 없이도 센강을 건넌 장애인 트라이애슬론 국가대표 김황태(47·포스코퓨처엠)는 밝게 웃었다. 도전과 의지로 패럴림픽을 빛낸 영웅 김황태를 3일(한국시간) 파리 개선문 앞에서 만났다.
김황태는 지난 2일 열린 트라이애슬론 PTS3 등급 경기에서 1시간24분01초를 기록, 11명 중 10위를 차지했다. 수영 750m, 사이클 20㎞, 육상 5㎞ 코스를 달린 그에게 순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센강을 헤엄쳐나오는 것만으로도 목표를 이뤘기 때문이다. ‘세상 가장 행복한 10위’다.
김황태는 “사전 연습 때는 유속이 느렸는데, 본 경기 때는 더 빨랐다. 첫 번째 다리 부분 유속이 굉장히 빨랐다. 그 부분을 거슬러 올라갈 때 힘들었다. 모든 영법을 써봤는데 답은 배영이었다. 살아남는 게 목표였다. 지난해 사전대회까지 두 번이나 센강에서 살아남았으니 만족한다”고 설명했다.
최선을 다한 그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감동했다. 파리 시내에서도 김황태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이들도 있었다. 김황태는 “SNS로 많은 연락을 받았다. 감사하다”고 했다.
김황태는 2000년 8월 전선 가설 작업을 하다가 고압선에 감전돼 양팔을 잃었다. 1년 동안 절망에 빠져 있다 일어섰다. 패럴림픽 출전을 목표로 육상, 노르딕스키, 태권도 등 다양한 종목을 섭렵했다. 그러다 트라이애슬론이 정식 종목이 됐다는 얘기를 듣고 시작했다.
가장 큰 힘을 준 사람은 아내 김진희씨다. 김씨는 김황태의 핸들러(경기 보조인)다. 종목과 종목 사이 경기복 환복과 장비 착용 등을 돕는다. 트랜지션(다음 종목 준비 과정) 시간도 경기에 포함된다.
김진희씨는 “보호자로 같이 지내면서 핸들러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받았다. 같이 있으니까 심리적으로도 안정되는 것 같다”고 했다. 김황태는 “24시간 같이 있으니까 하루에 열댓 번 다툴 때도 있다. 하지만 잘 되려고 하는 거니까 이해하고 화해한다”고 했다.
김황태가 사고를 당한 건 양가 상견례를 불과 한 달 앞둔 때였다. 김황태는 “서울에 있는 병원까지 아내가 오가며 나를 수발했다. 지금도 힘들고, 고맙다”고 했다. 울릉도에 사는 친구의 소개로 7년간 만난 두 사람은 끝까지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부부가 됐다. 김진희씨는 “잘 헤쳐 나가는 사람이니까 둘이 같이 잘 버텼다”고 했다.
그에겐 많은 조력자가 있었다. 트라이애슬론 도전을 결심한 뒤 대한장애인체육회 체육진흥부 민재홍 매니저에게 다짜고짜 연락했다. 고가의 장비가 필요한데 연맹이나 협회가 당시엔 없어 체육회의 도움이 필요했다.
민재홍 매니저는 장비를 빌리고, 스폰서를 구하러 다녔다. 비장애인 트라이애슬론 1세대 출신인 김정호 감독도 힘을 보탰다. 김 감독은 사전연습 때는 김황태와 함께 함께 센강을 헤엄쳤다. 김황태는 “나는 한국인 최초로 센강에서 헤엄쳤고, 감독님은 두 번째로 헤엄친 사람”이라고 웃었다.
김황태의 바람은 하나다. 한국 트라이애슬론 패럴림픽의 역사가 그에서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다. “태권도 주정훈 선수가 도쿄 대회에서 동메달을 딴 뒤 선수가 많이 유입됐다. 올해 5월 대한장애인트라이애슬론연맹이 창립됐는데 아직 정가맹단체가 아니다. 나를 보면서 많은 선수들이 도전했으면 한다. 아울러 지원도 늘어났으면 한다”고 했다.
경기를 마친 뒤 김황태는 눈물을 보였다. “아내가 부모님이 고생하신 얘기를 하면서 울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삶이 이기적이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항상 희생했다. 2007년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는 항상 주말에 나는 집을 비웠다. 딸에게도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다.
김진희씨는 “이제는 좀 편안하게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 가족과도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황태도 “패럴림픽 도전은 이번이 끝일 것 같다”고 했다.
패럴림픽 기간 경기에 집중하느라 선수촌에서만 지냈다. 출국을 앞두고서야 아내와 스태프들과 함께 간단하게 파리 시내를 둘러봤다. 그는 “한국에 돌아가면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고 싶다”고 껄껄 웃었다. raining99@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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