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지방의 한 조선소에서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산 자가 있고 죽는 자가 생긴다. 회사에서 잘린다고 해서 인생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지만, 정들었던 동료와 헤어지고 월급도 끊기는 건 무서운 일이다. 일을 못 해 잘렸다는 불명예도 생긴다. 새로운 직장이 더 나으리란 보장도 없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업무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 두려움도 커진다.
나가는 사람을 지켜보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심지어 타인의 생과 사를 내 손으로 선택해야 한다면, 더욱 괴로운 일이다. 윗선에서 지시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자책감이 생긴다. 꼭 정이 든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가 느낄 괴로움에 공감하게 된다. 해야 할 일을 한 자의 상처가 더 깊게 팬다.
박홍준 감독의 영화 ‘해야 할 일’은 한 조선소에서 발생한 구조조정을 담는다. 준희(장성범 분)가 인사팀에 발령되고 업무가 손에 익기도 전에, 회사에서는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회사에서 꼽은 이른바 ‘월급 루팡’ 리스트가 존재했다. 이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자르는 방법을 고안하는 작업부터, 수행하는 과정까지 인사팀에서 정해야 했다. 본의 아니게 칼자루를 쥔 셈이다.
구조조정을 실시한다는 회사의 공언이 나오자, 사내에선 긴장감이 감돈다. 준희에게 은근히 다가와 “나는 어떻게 되냐?”고 묻는 사람도 생겼다. 굳이 구조조정과 연관이 없지만, 전문대 졸업생에게 늘 야박했던 회사의 정책에 불만을 갖게 되는 사람도 늘어났다. 희망퇴직이 실시되고, 구조조정과 무관한 사람들이 사직서를 냈다. 가장으로서 꼭 버텨야 한다며 절규하는 사람들은 싸우려 했다. 회사 업무에 지칠 대로 지친 동우(서석규 분)는 구조조정은 꼭 필요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반대로 준희는 이 과정에서 심적으로 매우 큰 괴로움을 느낀다.
‘해야 할 일’은 인사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박 감독이 직접 겪은 일을 토대로 만든 작품이다. 극 중 사내 분위기는 실제 직장인이 느끼는 광경과 매우 흡사하다. 고요하게 감정 없이 은밀하게 피바람을 준비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렸다. 대사도 매우 현실적이고, 배우들의 연기도 차분하다. 감정 신에서조차 직장 내에서 벌어질 법한 장면으로만 채웠다. 소재가 구조조정이라 더 오싹하다.
전반적으로 카메라를 멀리 두면서 객관성을 담보했다. 감정신에서조차 클로즈업을 찾을 수 없다. 연출가의 욕망을 철저히 제거한 셈이다. 관객들에게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할지 중립적으로 담으려는 의도만 엿보인다.
사측과 노측의 입장도 매우 중립적으로 다뤘다. 이런 경우 힘 있는 사측을 비판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해야 할 일’은 중간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측의 입장과 노동자 측의 상황을 적절히 배분했다. 그래서 더 생각할 거리가 많다.
배우들의 연기가 매력적이다. 화자인 준희 역의 장성범과 동우 역의 서석규를 비롯해 장리우, 김도영, 김영웅 등 모두가 직장인처럼 연기했다. 일을 일로만, 동료를 딱 동료로만 대하는 태도가 온몸에서 전달된다. 구조조정 이후 갈등이 깊어지는 과정에서도 다들 침착하다. 그 안에서 오는 서스펜스가 짙다.
준희의 예비 아내 재희 역의 이노아는 작품의 생기를 준다. 유일하게 분노가 아닌 감정을 내비치는 인물이다. 장치적으로 소모되기 좋은 역할임에도, 배우의 매력만으로 생기를 넣는다. 덕분에 더 풍성해졌다. 배우 모두가 해야 할 일을 잘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회사 내 인물들이 느끼는 아픔과 괴로움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온다. 갈등만 깊어진 채 다시 불편한 동거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 팀워크가 무너진 회사가 더 나아질 거란 희망은 없다. 박 감독은 먹거리가 부족한 상황에서 벌어진 위기에 정확한 답은 없다는 답을 내놓은 것 같다. 감독이 그려낸 현실이 아프게 가슴에 꽂힌다. 괜히 영화제를 휩쓴 작품이 아니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기사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