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부산=함상범 기자] 조선은 신분제 사회다. 노비는 가축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모시는 주인이 잘못하면 대신 매를 맞기도 했다. 기르는 가축보다 못한 부림 당하는 존재다. 최소한의 존엄을 받지 못한 노비들은 이를 갈았다. 그러다 전쟁이 터졌다. 왜가 쳐들어왔다. 왕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국정은 마비됐다. 버림받은 백성에게 전쟁은 어쩌면 기회다. 모시던 양반을 죽이고 노비 문서를 태웠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넷플릭스 영화 ‘전, 란’의 배경이다.
신분제 사회라고 해서 모두 순응하는 건 아니다. 무과 집안의 계보를 잇는 종려(박정민 분)와 그의 몸종 천영(강동원 분)은 어릴 적부터 대련하며 우정을 쌓았다. 노비가 양반의 목을 조르며 웃는다거나, 서로 말도 편하게 놓았다. 둘은 둘도 없는 동무다.
천영의 무술은 종려를 뛰어넘는다. 매번 무과 급제에 실패한 종려 대신 천영이 과거를 봐 장원급제했다. 과거에 급제하면 노비문서를 태워주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종려의 부친 이극조(홍서준 분)가 거부하면서 우정에 금이 갔다. 장원에 급제한 종려는 임금의 호위무사가 됐고, 천영은 도망쳤다 추노꾼에게 붙잡히길 반복했다. 그 사이 우정의 끈은 끊어졌다.
그러다 전쟁이 터졌다. 종려의 노비들은 그 식솔을 모두 죽이고, 집을 불태웠다. 기절해 있던 천영은 뒤늦게 깨어나 수습하려 하지만 실패했다. 모든 식솔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종려는 분노했다. 살기가 생겼다. 둘은 이윽고 의병장과 호위무사로 진검을 들고 맞붙는다.
임진왜란을 끌고 온 ‘전, 란’은 정치적인 메시지를 분명히 담았다. 체제를 전복하려는 진보적 세력과 유지하려는 기득권 간의 싸움을 여러 레이어로 짰다. 신분제 체제에서 우정을 나눈 종려와 천영, 전쟁 중 거둔 성과를 왕의 논공행상을 통해 보상받으려는 의병장과 왕과 무관하게 누리고 싶은 의병을 앞세우는 게 그 예다. 뚜렷한 답을 주기보다는 희미하게 질문을 던지는 형태다.
비록 신분제는 아니지만, 자본과 권력 등으로 계급과 신분이 나뉘는 현재 한국 사회를 관통한다. 왜 부산국제영화제가 부담스러울 수 있는 OTT 영화를 개막작으로 선택했는지 충분히 이해된다.
머리를 질끈 묶은 강동원과 갓을 벗고 힘차게 달리는 박정민의 검술 액션은 생동감이 있다. 단 2~3합 만에 팔다리가 잘리고 목이 쓸리는 잔혹한 장면이 이어진다. 잔인한 장면을 보기 힘든 관객에겐 어려울 수 있지만, 매우 시원한 연출이다. 고어 장르를 즐기는 관객에겐 축제나 다름없다. 글로벌 관객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영리한 선택이다.
사연 있는 악을 그린 박정민은 무게감이 있고, 분노를 담은 강동원의 눈은 날카롭다. 선조를 맡은 차승원은 비린내 나는 이기심을 풍겼고, 의병장 자령 역의 진선규는 품위가 있다. 범동 역의 김신록은 작품에 에너지를 실어주고 겐진 역의 정성일은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멋진 왜군을 그렸다. 이 외에도 모든 배우가 공기를 꽉 채운다.
전개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워낙 묵직한 맛에 관객을 끌고 가는 힘이 있다. 초반부터 몰입하게 만든다. 왕이 손으로 머리를 짚으면, 고개를 떨구는 백성의 얼굴로 이어지는 등 컷이 착착 붙는다. 크고 작은 부분에 설계가 잘 된 작품이다. 영원한 편도 적도 없다. 반전이 이어진다. 끝까지 눈을 뗄 수 없다. 후반부 1:1:1 액션은 매우 신선하다. 그 끝에 감동도 담았다.
한국의 비정한 권력과 선조의 이기심은 매우 닮았다. 자신의 권위를 위해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선조나, 그들의 욕망만을 위해 살아가는 현 정권이 그렇다. 여러 각도로 깊이 있게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대중성과 완성도, 시대의 아픔을 명확히 전하는 이 영화가 OTT라는 이유로 개막작이 아닐 이유도 없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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