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작품마다 유독 어려운 역할이 있다. 연출가가 디렉션을 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극단적 양면성, 복잡한 감정 표출, 적절한 존재감 등 숙제가 많다. 훌륭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인물 해석이 좋을 뿐 아니라 작품 전체를 읽는 시야도 넓어야 한다. 오묘한 톤과 선을 정확하게 잡는 기술도 필수적이다. 요즘 이 방면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배우는 노재원이다.

지난해 넷플릭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이하 ‘정신아’)를 시작으로 ‘살인자ㅇ난감’ 디즈니+ ‘삼식이 삼촌’ MBC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이하 ‘이친자’)까지 연이어 엄청난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단 한 문장으로 묘사할 수 없는 감정과 그것을 둘러싼 복잡한 레이어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정신아’에서는 정신병에 걸린 환자였고, ‘살인자ㅇ난감’에선 데이트폭력을 저지르는 소시오패스였다. ‘삼식이 삼촌’에선 깡패 서대문파 리더였는데 ‘이친자’에선 형의 죽음에 트라우마가 있는 MBTI 극F형 프로파일러로 얼굴을 바꿨다. 선과 악을 자유자재로 오고 가는 사이에서도 독창적인 연기를 펼친다.

‘정신아’에선 현실과 게임을 구분하지 못하는 망상 장애 환자 서완을 맡았다. 정신의학과 간호사인 정다은(박보영 분)을 게임 캐릭터 ‘중재자’로 이해하고 늘 “중재자님”이라고 불렀다. 순수하게 다은을 대하는 얼굴이 예뻐, 유독 시청자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러다 자신의 아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슬픈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괴로워하는 얼굴은 이전의 순수한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노재원이 만든 파동이 작품 끝까지 영향을 끼쳤다.

‘살인자ㅇ난감’에선 치밀하고 잔인하게 데이트 폭력을 저지르는 민상을 맡았다. 몰래카메라를 찍는가 하면 양다리를 걸치기도 했다. 자신이 유리하기 위해 상대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데도 거침없었다. 악인을 죽이는 사명을 스스로 맡은 송촌(이희준 분)에게 붙잡혔을 땐 누구보다 불쌍한 태도로 동정심을 구했다. 선과 악, 지질함을 동시에 표현했다. 긴 분량이 아니었지만, 임팩트는 상당했다.

‘이친자’에선 누구보다 공감능력이 뛰어난 프로파일러 대홍으로 나섰다. 수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성향 파악으로 여기는 인물. 따뜻하고 예민하게 사건에 접근하는 프로파일러다. 느리면서도 리드미컬한 말투를 개발해 대홍을 만들었다. 부드러운 인상이라 편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날카로운 감각이 있다. 짧게 지나가는 순간에도 독특한 호흡과 작은 액션만으로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작가와 연출의 영역 밖에서 개인기로 작품의 빈틈을 채우는 배우다.

노재원은 “케이스마다 늘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건 어떻게 ‘연기를 뺄까’를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이 인물답게 최대한 존재하는지 고민한다. 무언가를 하지 않고도 그 인물처럼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고 연기관을 전했다.

실력자는 실력자를 알아보는 법이다. 유명 연출가들이 앞다퉈 노재원을 캐스팅하려 하고 있다. 이미 넷플릭스 ‘오징어게임2’ 촬영을 마쳤고, 우민호 감독의 첫 시리즈 ‘메이드 인 코리아’를 촬영 중이다. 워낙 연기력이 출중해 찬 바람이 쌩쌩 부는 중에도 열일하는 중이다. 새로운 ‘천의 얼굴’이 이렇게 탄생하고 있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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