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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골든게이트가 보인다.”
1993년 10월 28일 카타르 도하 알아흘리 경기장에서 열린 1994 미국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 일본-이란 맞대결에서 후반 35분 일본 공격수 나카야마 마사시가 2-1 리드골을 터뜨릴 때, 이를 중계하던 일본 캐스터는 자국 축구 첫 월드컵 본선행을 확신한 듯 이렇게 소리질렀다. 하지만 10분 뒤 추가시간 이라크 자파르의 헤딩 동점골이 터지면서 일본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마지막에 웃은 팀은 다른 경기장에서 북한을 3-0으로 이긴 뒤 그라운드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나오던 한국 선수들이었다. 그게 바로 한국축구사 한 장면을 장식하며 지금까지 회자되는 ‘도하의 기적’이다.
◇‘도하의 기적’ 나비효과
‘도하의 기적’이 일어난지 정확히 20년이 흘렀다. 그 순간은 양국 축구사에 중요한 의미로 평가받고 있다. 최종예선이 2002월드컵 유치 전초전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8년 일찌감치 유치위원회를 구성한 일본은 월드컵 본선에 한 번도 오르지 못한 핸디캡을 그 때 만회하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반면 한국은 가슴 속 월드컵 개최 꿈을 ‘도하의 기적’과 함께 현실로 옮겨놓았다. 당시 대한축구협회 지원총괄부장이었던 김원동 현 부산 사장은 “서울로 오는 비행기에서 정몽준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이 ‘이제는 2002년 월드컵이다’고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최종예선 경기장에 ‘2002 일본월드컵’이라는 광고판까지 세웠던 일본에 이라크전 무승부는 큰 타격이었다. 이듬 해 유치위원회를 발족, 추격전에 나선 우리가 결국 1996년 공동 개최까지 일궈냈다”고 평가했다. 김호 당시 대표팀 감독은 “북한을 이긴 뒤 교민들에게 인사라도 잘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2-2’라는 소리가 들려와 환호했던 기억이 난다. 3회 연속 본선행은 세계 축구계에 ‘아시아 맹주는 한국’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줬다”고 평가했다. 월드컵 유치에 나서고 공동 개최에 성공하면서 한국 축구는 질적, 양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1995년 전남과 전북, 1996년 수원 창단 등 지금 K리그의 골격이 조금씩 완성됐고,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손색 없는 10개 경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국민을 감동시켰던 한·일월드컵 4강 신화, 2002 키즈들이 만들어낸 런던올림픽 동메달 기적, 숱한 해외파 스타들의 출현 등 ‘도하의 기적’ 나비효과는 엄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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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앞으로 20년은….
한국 축구는 20년이 되는 올해 새로운 도약을 노린다. K리그는 1~2부리그를 도입, 선진 시스템으로 가기 위한 발돋움을 하고 있다. 협회는 정몽규 신임 회장이 취임하면서 축구의 산업화를 위한 노력을 진행 중이다. 20년 전 협회 지원총괄부장 이후 한국프로축구연맹 사무총장과 강원FC 사장 등 축구계 요직을 두루 경험했던 김원동 부산 사장은 “도하의 기적 이후 20년간 한국 축구는 한국 경제처럼 압축 성장을 하는 과정이었고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며 “이제는 체계적인 발전을 모색하는 게 필요하다. 2부리그가 생기는 등 지금 한국 축구는 그런 진화가 일어나는 과도기에 있다. 앞으로 20년이란 시간엔 이를 잘 완성해나가야 한다”고 전했다. 한국와 일본에서 모두 선수 생활을 했던 북한전 득점포 주인공 하석주 전남 감독은 “경기장 등 훌륭한 인프라가 갖춰졌지만 이를 관리하고 업그레이드하는 기술은 일본 등과 비교할 때 아쉽다. 구장을 짓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잔디 관리 등 축구를 보고 즐길 수 있는 전체적인 환경을 잘 조성하는 게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며 패러다임 전환을 촉구했다. 한.일 양국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숙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도 관심사다. 일본은 미국월드컵 본선행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지난 20년간 축구에 많은 투자와 애정을 쏟았다. 그러나 최근 J리그가 한국 K리그처럼 프로야구에 밀려 고전하는 고민을 안고 있다. 유망주들의 유럽 진출이 증가하는 현실 속에서 자국리그 인기를 어떻게 끌어올리고 국민스포츠로 자리잡는가가 양국 모두의 현안으로 등장했다.
김현기기자 silva@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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