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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스포츠서울 칼럼니스트] 세계적인 슈퍼스타로 자리잡은 방탄소년단(BTS)의 팬클럽은 아미(A.R.M.Y.)다. 영어 문장의 단어 앞글자를 딴 애칭이다. 그런데 아미의 원조는 아놀드 파머(2016년 작고)다. 파머는 골프 사상 최초의 슈퍼스타였다. 구름떼처럼 몰려 다니는 파머의 갤러리들을 ‘아니의 군단(Arnie’s Army)’라고 불렀다. 파머는 빼어난 용모에 클러치 능력까지 갖고 있었다.
현재 세계적인 스포츠 에이전시가 된 IMG는 파머와 함께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IMG의 창설자 마크 맥코믹(작고)은 1960년 회사를 창설했다. 예일대학 로스쿨 출신의 맥코믹이 IMG를 설립한 것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파머의 일정을 관리한데서 시작됐다는 게 정설이다. 파머와 맥코믹은 친구 사이이기도 하다. IMG의 첫 번째 고객은 파머였고 이후 잭 니클로스, 개리 플레이어 등 골프 스타들이 모두 IMG에 합류했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도 IMG 고객이다.
파머는 PGA 투어의 첫 슈퍼스타이지만 그랜드슬램은 달성하지 못했다. 메이저대회에서 7승을 거뒀으나 PGA 챔피언십에서는 3차례 공동 2위에 그쳤다. 파머가 PGA 투어 정상에서 최고 인기를 누릴 무렵인 1961년 니클로스(78)가 프로에 데뷔했다. 둘은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며 PGA 투어를 인기 종목으로 이끌었다. 니클로스는 PGA 투어 통산 73승(이 부문 3위)을 작성했는데 메이저 대회에서 유난히 강해 그랜드슬램과 함께 18승으로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파머는 통산 62승(5위)을 기록하고 은퇴했다.
파머-니클로스 시대가 저물고 등장한 이가 ‘왼손 지존’ 필 미켈슨(48)과 훗날 ‘골프 황제’가 된 타이거 우즈(42)다. 캘리포니아 출신인 미켈슨과 우즈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 Q스쿨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PGA 투어에 데뷔했다. 미켈슨은 1982년 애리조나주립대를 졸업한 뒤 프로에 뛰어 들었다. 스탠포드대 2학년을 마친 우즈는 1996년 “Hello World!”라는 첫 일성의 프로 기자회견으로 돌풍을 예고했다. PGA 투어에 먼저 데뷔한 미켈슨은 우즈의 그늘에 가려 만년 2인자로 평가됐다. 특히 메이저 대회에서 약점을 보여 ‘새가슴’이라는 비아냥도 들었다. 그러나 2004년 생애 첫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스 우승으로 미켈슨은 슈퍼스타 반열에 올라섰다. 2013년에는 미켈슨의 스윙으로는 절대 우승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브리티시오픈마저 거머쥐었다.
PGA 통산 43승(9위)을 기록하고 있는 미켈슨은 메이저 5승을 달성했다. 왼손 골퍼로는 모두 최다승이다. 하지만 파머처럼 그랜드슬램에는 실패했다. PGA 투어 사상 최다 6차례 2위에 머무른 US오픈이 빠져 있다. 2006년 뉴욕주 윙드푸트 코스에서 벌어진 US오픈에서 마지막 홀 판단미스로 우승을 놓쳐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최종홀에서 파만 작성하면 우승할 수 있었던 기회를 드라이브와 세컨드샷 미스로 호주의 제프 오길비에게 트로피를 헌납했다. 미켈슨은 18번 홀 그린에서 머리를 쥐어 짜며 “나는 바보야(I am such an idiot)”라고 탄식해 팬들의 안타까움을 사기도 했다.
24일(한국 시간) PGA 투어 80승(2위)의 우즈와 미켈슨이 미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북부 새도우 크릭 골프코스(파 72, 7560야드)에서 상금 900만 달러(101억7000만 원)가 걸린 매치 플레이를 펼친다. 둘의 전성기 시절 이런 빅이벤트를 벌였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라이벌 빅매치는 늘 전성기가 지났을 때 성사된다. 전성기 때는 패배의 상처가 크게 남는다. 둘은 올해 나란히 2013년 이후 5년 만에 PGA 투어 우승을 추가했다. 우즈는 시즌 피날레 투어 챔피언십, 미켈슨은 WGC-멕시코 챔피언십 우승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우즈와 미켈슨의 매치 플레이는 유료방송이다. 미국내에서 19달러 99센트를 내야 한다. 흥행의 지수는 얼마나 많은 팬들이 유료방송을 시청하느냐에 달려 있다. 추수감사절 다음 날인 이날 대학풋볼이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져 관심도는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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