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조은별기자]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게임’(2021), 디즈니플러스 ‘카지노’(2022), 쿠팡플레이 ‘미끼’(2023). 각 OTT를 대표하는 세 작품은 ‘허성태’라는 공통점으로 통한다.

456억원의 상금 쟁탈전을 벌이는 ‘막장인생’들을 힘으로 제압하려는 조직폭력배 덕수, 필리핀 한인 카지노 황제를 감히 배신하려다 제 꾀에 넘어간 태석, 그리고 조희팔을 연상케 하는 희대의 사기꾼 상천까지.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나쁜 놈들은 모두 허성태를 통해 화면에서 생생하게 구현됐다. 이쯤되면 OTT의 총아, K악역의 대표주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드라마 속에서는 감히 말도 붙이기 어려운 포스지만 실제 허성태는 내향적이고 소심한 성격이다. 지난 4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허성태는 “MBTI가 INFJ(내향형)다. 원래 성격과 다른 역할을 연기하다 보니 무게 있는 척, 멋있는 척, 싸움 잘하는 척 할 때마다 오그라들곤 한다”고 말하며 웃었다.

◇‘밀정’으로 악역 시작, ‘허성태 유니버스’까지 완성미끼’ 노상천이 역대급 빌런

허성태의 악역 인생은 2016년 영화 ‘밀정’이 시작이다. 당시 송강호에게 호되게 뺨을 맞던 친일 첩보원 하일수로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듬해 영화 ‘범죄도시’에서 장첸(윤계상 분)과 대립각을 세우다 죽은 독사파 안성태, 영화 ‘남한산성’의 청나라 장수 용골대 역으로 상업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밀정’의 김지운 감독은 하일수를 맛깔나게 연기한 허성태를 ‘남한산성’의 황동혁 감독에게 소개시켰다. ‘남한산성’에서 진짜 중국인 못지않은 연기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킨 그는 다시금 황 감독의 러브콜을 받아 ‘오징어게임’에 출연하면서 글로벌 배우로 거듭났다.

허성태는 “당시 몇몇 대형 기획사에서 하일수 역을 따기 위해 출연료를 안 받고 자사 배우를 출연시키겠다는 제안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지운 감독님은 공개오디션을 통과한 나를 끝까지 고집했다”며 “그 뒤 황동혁 감독님에게 소개시켜줘 ‘오징어게임’까지 오게 됐으니 따지고 보면 은인이나 다름없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다채로운 악역을 연기하다보니 팬들이 ‘허성태 유니버스’를 만들어 공유하기도 했다. ‘범죄도시’ 안성태는 독사파, ‘오징어게임’ 장덕수의 뱀문신, ‘카지노’의 서태석은 뱀에 물려 죽는다. 허성태는 1977년생으로 뱀띠다. 허성태는 “이런 세계관을 만들어줘서 감사하다”고 웃었다.

수많은 악역 중에서도 최근 출연작인 ‘미끼’의 노상천은 역대급이라는 게 허성태의 설명이다. ‘미끼’는 5조원대 사기를 치고 도피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사기꾼 노상천이 잇따라 벌어지는 살인 사건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수조원대 유사수신 사기 사건을 벌였다는 점에서 실존 인물인 조희팔을 연상케 한다.

허성태는 “‘미끼’전에는 ‘밀정’의 하일수를 꼽곤 했는데 지금은 노상천”이라며 “노상천은 불특정 다수에게 큰 피해를 준다. 이 일 때문에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고 사회적 파장이 크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노상천은 허성태에게 첫 주연이라는 타이틀을 안긴 인물이라는 점에서 애착이 크다. 허성태는 “어떤 작품보다도 제 아이디어가 많이 녹아있는 작품”이라고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노상천의 생애를 빌드업했다. 동네건달에서 사업 초창기를 거쳐 위기에 봉착하다 큰 성공을 거둔 노상천까지 5∼6개 파트로 나뉜 노상천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또 “평소보다 말 속도도 빠르게 했고 목소리 톤도 높여서 피해자들에게 희망을 주려는 듯한 모습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다른 악역과 노상천 연기의 구체적인 차이점을 짚었다.

◇대기업 다니다 늦깎이 연기자 전직, 출연료 15만원 받으며 월세살이이제 쓰리룸 전세

알려졌다시피 허성태는 대기업에 근무하다 뒤늦게 연예계에 뛰어든 늦깎이 배우다. 부산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한 뒤 LG전자 해외영업부와 대우조선해양 기획조정실에서 샐러리맨으로 근무했다. LG전자 재직 당시 러시아에 가장 TV를 많이 판 ‘판매왕’에 오르기도 했다.

서른다섯살, 과장 진급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술김에 SBS ‘기적의 오디션’에 지원한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과감히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아내는 “돈은 내가 벌면 되니까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했다.

퇴직금으로 원룸을 구해 50여 편의 단편영화에서 단역을 전전했다. 그때 받았던 출연료는 15만원. 허성태는 “이제 뒷자리에 ‘0’이 많이 붙었다”며 “당시 원룸에서 고생했는데 이제 서울 금천구 독산동 쓰리룸에서 산다. 아직 전세살이다”라고 웃었다.

아내와 팔순의 어머니는 허성태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허성태는 “OTT작품에 자주 출연하다보니 어머니가 휴대폰과 TV를 이용해 모든 OTT를 볼 줄 아신다”며 “주변에서는 악역만 연기한다고 우려하지만 어머니는 ‘성공한 배우들은 네 연차 때 악역을 많이 했다’고 오히려 독려해줬다”고 전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어머니가 가장 좋아한 역할은 tvN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기’의 구해준이었다고. 허성태는 “아무래도 대표고 옷도 잘 입고 로맨스도 있는 것 같으니 좋아하시는 것 같다”고 멋쩍어 했다.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을까. 허성태는 단호하게 “카메라가 돌아갈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회사를 다닐 때 꿈꿨던 배우의 삶을 살게 돼 천만다행이다. 그럼에도 가족을 위해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억제하고 희생하는 ‘K가장’들이 가장 대단한 분이다. 그들 모두를 응원한다.”

mulgae@sportsseoul.com

기사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