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정하은기자] 배우 손석구(40)가 ‘불혹’에 전성기를 맞았다.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가장 주목받는 남자 배우로 꼽히는 그가 배우가 된 과정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중학생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 미국 시카고예술대학교를 다니던 중 자이툰 부대로 자원입대했다. 전역 후 26세에 농구 선수의 꿈을 안고 캐나다로 향했다. 그곳에서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회사의 영업사원으로 방문 판매를 하기도 했다. 그런 손석구가 ‘배우’라는 새로운 꿈을 시작한 건 2016년, 33세였다.

그 시기를 손석구는 “칠흑 같았던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30대 초반에 바닥을 찍었다”는 그는 “나이가 들수록 자기만의 커리어를 만들어야 하고, 마치 그게 내 가치인 거 같은 느낌이 들지 않나. 나는 연기가 너무 하고 싶은데 아무도 나를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는게 싫었다”고 떠올렸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D.P.(디피)’ 시리즈 속 임지섭(손석구 분)을 변화시킨 건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과 좌절감이었다. 배우 손석구에게도 그랬다. 그는 “그 시간동안 자책을 많이 했다”며 “칠흑을 한번 보고 나면 생존본능이 생겼다. 그러면서 조금씩 변화했다”고 털어놨다. 그래도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금은 ‘바닥’이 있어도 괜찮다는 점이다.

“예전엔 바닥에 떨어지면 안된다는 생각에 두려워했다면 이젠 초연해요. 상황이란 건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단 걸 깨달았죠.”

변화와 성장을 거듭해 지금의 톱스타가 된 손석구처럼, ‘디피’ 시리즈 속에서 그가 연기한 임지섭 역시 변화와 성장을 거듭한다. 시즌1과 비교했을 때 가장 변화가 큰 인물로 꼽힌다. ‘디피’는 군무 이탈 체포조(D.P.) 준호(정해인 분)와 호열(구교환 분)이 현실과 부조리에 끊임없이 부딪히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넷플릭스 시리즈로 지난달 28일 공개됐다.

손석구가 연기한 임지섭은 시즌1에서는 실적에 눈이 멀고 이기적인 인물로 비쳤지만, 조석봉(조현철 분) 사건으로 죄책감과 책임감을 겪은 뒤 시즌2에서 군대 내 비리를 폭로하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변화가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대의를 위해 싸우려 하지만 개인적인 사건으로 ‘흑화’되기도 하고, 상사인 구자운(지진희 분) 준장 앞에서 소신을 이야기하는 마지막회 법정신에서도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고 흔들린다. 그래서 시청자들에겐 임지섭이 더 현실적이고 실존 인물 같은 느낌을 준다.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라는 평가도 받았다.

“누구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를 하려다가도 좌절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게 변화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데 임지섭의 그 부분이 흥미로웠죠. 변화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그 마음이 복잡하고 스스로에 대한 실망 등이 쌓이는 등 다면적으로 표현하는게 재미있었어요.”

손석구는 대본을 받았을 때부터 이러한 임지섭의 변화를 인지했다.

“시즌1과 시즌2로 나뉘어 공개됐지만 12개의 에피소드로 봤을 땐 임지섭의 변화가 점층적으로 진행된다고 해석하며 연기했어요.”

손석구는 지난해 JTBC ‘나의 해방일지’와 영화 ‘범죄도시2’를 잇따라 흥행시키며 배우로서 빛나는 전성기를 맞았다. 손석구의 늘어난 인기와 인지도처럼 ‘디피’는 시즌1에 비해 시즌2에서 손석구가 극중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느껴진다. 일각에선 배우의 가치가 커지면서 덩달아 그의 분량도 늘어난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한 손석구의 생각은 단호했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다. 한준희 감독님 역시 그럴 분이 아니다”였다.

그는 “‘범죄도시2’, ‘나의 해방일지’가 나오기 한참 전에 ‘디피’의 대본을 봤고, (인지도가 올라간) 이후로도 대본과 분량이 바뀌지 않았다”며 “시즌1에서는 임 대위가 준호의 장애물이었다가, 시즌2에선 서포트하는 역할로 바뀌다 보니 임지섭이 더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어서 분량이 많아졌다고 느끼신 거 같다”고 소신을 이야기했다.

실망과 좌절, 자책의 파란만장한 시간을 지나 꽉 채운 40세가 된 그의 생각과 태도는 조심스럽지만 솔직했고, 유연하면서도 단단했다. 그리고 그 답은 예상치 못한 동양철학에 있었다.

손석구는 “제 연기 선생님은 공자다”라고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30대 초반 연기를 시작했지만 작품을 만나지 못했을 때, 손석구는 집 앞 찻집에서 동네 어르신들과 다도를 하는 시간을 즐겼다. 그곳에서 공자의 논어를 읽어보라는 조언을 듣고 공부를 시작했다. 나중에는 원본을 읽기 위해 중국어 학원까지 다닐 정도로 빠져들었다.

늦깎이 배우 지망생에 별다른 연기 공부도 하지 않았던 그가 논어로 배운 건 자신과의 대화였다. “요즘에도 내 안에 불순물이 많이 쌓였다 싶으면 논어를 보거나 듣는다”는 그는 “우리나라에서 학교를 다니지도 않았고, 정식으로 연기 공부를 하지도 않아서 저는 논어를 읽으며 연기를 배운 거 같다. 내용이 방대하지만 굉장히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이야기들이다. 스스로와 솔직하게 대화해라, 거기에 답이 있다. 그게 연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스로 쌓아올린 단단한 연기관, 불혹의 ‘대세’ 손석구를 완성시킨 힘이다.

jayee212@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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