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기자] 배우 정우성이 김성수 감독으로부터 ‘서울의 봄’ 시나리오를 받은 건 영화 ‘헌트’ 촬영 직후였다. 정우성이 연기한 ‘헌트’ 김정도와 ‘서울의 봄’ 이태신은 공교롭게도 신군부 세력과 맞서 싸운다는 공통점이 있다.
비록 ‘헌트’와 ‘서울의 봄’이 영화 장르나 성격, 메시지가 다르지만, 주어진 인물이 신군부에 반감을 갖고 맞선다는 점에서 배우에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사실상 변화를 주기 어렵다.
정우성은 고사를 반복했고, 김 감독은 집요하게 제안했다. “그러면 이 영화 엎어버리자”는 김 감독의 압박에 정우성이 끝내 굴복했다. “신군부가 등장하면 정우성이 마중 나간다”는 영화계 속설이 탄생한 배경이다.
지난 22일 개봉한 ‘서울의 봄’에서 이태신은 누구도 쥐여주지 않은 권력을 강탈한 신군부에 끝까지 저항한 인물이다. 앞서 김 감독은 “비록 신군부의 승리를 막지는 못하지만, 결국 이태신 같은 군인 덕분에 그들을 추악한 승자로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영화는 개봉 전부터 평단의 호평이 자자하며, 예매율도 여름 시장 블록버스터 수준이다. 호재가 많다.
정우성은 “김성수 감독의 작품이 호평받는 건 매우 기쁜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거니까. 다만 배우로서는 부담스럽다. 한 치의 의심 없이 확신을 갖고 연기했지만, 전반적인 밸런스에 있어서는 불확실성이 있다. 좋은 평가를 받길 원하지만, 지금의 호평은 ‘이 정도인가?’싶다”고 말했다.
◇“이태신은 네버엔딩 앵벌이, 외롭고 답답했다”
12.12 군사 반란은 오랫동안 승자의 스토리로만 펼쳐져 왔다. 군내 사조직 하나회 리더를 주축으로 어떤 일을 어떻게 벌였느냐에 초점을 맞췄었다. 단 9시간 만에 결정 난 싱거운 승부로 기억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나회는 그만큼 똘똘 뭉쳐 있었다.
김성수 감독은 실제 인물을 모티브해 만든 이태신을 삐쭉 올려세운다. 그리고는 전두광(황정민 분)과 1:1 구도를 만든다. 뺏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구도를 만든다. 원사이드한 게임으로 알려진 지난 12.12 군사 반란은 엎치락뒤치락 반전이 많았다. 그 안에서 인간의 욕망이 꿈틀거린다.
“감독님이 ‘아수라’ 때부터 자주 했던 말이 있어요. ‘내 안에는 A도 있고, B도 있고, C도 있어. 여러 자아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서 표현하는 거야’라고요. 인간 군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서울의 봄’이 결정판 같아요. 감독님은 선과 악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니에요. 인간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저도 그래서 정의를 앞세우진 않았어요.”
영화는 불과 물의 싸움 같다. 반란군이 불처럼 뜨겁게 욕망과 감정에 충실한 반면, 이태신을 비롯한 진압군은 차갑다. 욕망을 억누르고 이성으로 승부한다. 불은 번져 가는데, 물은 메말라간다. 이태신은 외로운 싸움을 하게 된다.
“‘네버엔딩 앵벌이’였어요. ‘출동 해주셔야 합니다’, ‘먼저 와주셔야 합니다’만 반복하죠. 전화로만 연기해요. 엄청 답답했어요. 그 답답함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대처하는 방식이 이태신을 완성해준 것 같아요. 전화선 너머로 다가가고 싶은데, 감정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삭혀야 하니까 연기할 땐 돌겠더라고요.”
◇“분장을 넘어서 뿜어져 나온 황정민, 너무 강렬해 무서웠다”
‘서울의 봄’이 인상적인 건 전두광을 연기한 황정민의 착장이다. 머리를 확 밀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 것과 더불어 색다른 색을 입혔다. 마치 늑대처럼 선이 굵다. 상대를 해야 하는 배우 입장에선 두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황정민이 원래도 강렬한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인데 착장마저 실제와 가까워, 기세 싸움에서 밀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었다고 한다.
“분장을 넘어서서 캐릭터가 뿜어져 나오더라고요. ‘이걸 어떻게 감당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러웠어요. 기운이 정말 좋았으니까요. 제가 벌거벗겨져 있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현장에서 더 보려고 했어요. 육군본부 복도에서 만나는 장면이 전두광과 만나는 첫 장면이었어요. 리허설 할 때는 100%를 다하지 않아요. 기운을 살피는 거죠. 본 테이크를 갔는데 정민이형이 이태신을 느끼더라고요. 댜행이다 싶었죠.”
정우성은 ‘아수라’의 박성배(황정민 분)과 ‘서울의 봄’ 전두광과 맞섰다. 박성배나 전두광이나 개인의 욕망만 달성하려는 악한 인물에 가깝다. 두 역할 모두 레전드라 불릴 정도로 황정민의 연기가 살벌하다.
“박성배는 설득력 없이 자기주장을 해요. 자기애가 강한 사람 같은 느낌. 전두광은 무서운 게 설득력이 있어요. 둘 다 감정적이고 욕망에 충실한데, 전두광은 떡고물을 다 주겠다면서 자신의 영달에 사람들을 끌고 모으잖아요. 사람의 약점을 너무 잘 알죠. 그래서 더 무서웠던 것 같아요.”
제주 4.3 사건을 다룬 ‘헌트’와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서울의 봄’까지, 정우성은 두 편에서 현대사의 비극의 중심에 섰다. 과연 배우가 이런 강렬한 이야기에 놓일 때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궁금했다.
“오히려 다 떨쳐내야 해요. 역사적 사건에 짓눌리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감독의 의도를 알고 더 집중해야죠. ‘서울의 봄’은 김성수 감독님이 욕망의 이야기로 접근했어요. 역사적 사실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저는 안도했고, 기댈 수 있었어요. 영화는 다큐가 아니잖아요. 이야기의 본질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해요.”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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