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독일에서 농구 선수를 하다 배우로 전향한 유태오의 얼굴에는 한국 배우에겐 보이지 않았던 정서가 가득하다. 묘한 쓸쓸함과 우울함, 이방인의 낯선 내음이 풍긴다.

이제야 김치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음식이 됐지만, 파독 근로자로 독일에 이민 간 한국 부모님이 싸준 도시락 속 김치는 조롱거리였다. 남들과 다른 피부색과 말투는 그에게 결핍을 줬다. 농구 선수임에도 감수성이 풍부한 유태오는 소속감도 질기지 못했다. 한국에 와서도 완벽히 어우러질 수는 없는 문화와 말투의 차이가 있었다.

연기를 시작한 뒤엔 역할의 제한이 컸다. 외국인의 이미지가 짙은 발음 때문에 유태오는 교포 외의 역할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대사가 드물거나, 더빙을 해야 하나 외국계 출신 역할을 맡곤 했다.

그런 점에서 지난 6일 개봉한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속 ‘토종 한국인’ 해성을 연기하는 건 유태오에게 특별한 도전일 수밖에 없다. 미국 내 시네필들이 사랑하는 제작사 A24가 만드는 이 영화에 대한 유태오의 열정은 출발부터 뜨거웠다.

유태오는 지난 “외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내겐 늘 불안한 요소가 있었다. 시나리오를 다 읽고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독일 이민자의 아들, ‘김치’로 조롱받던 어린시절의 ‘결핍’ 겹쳐

‘패스트 라이브즈’는 어릴 적 첫사랑이었던 해성과 나영(그레타 리 분)이 24년 만에 재회하면서, 그간 쌓아왔던 감정을 해소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풋풋하게 좋아하는 감정을 두고 미국으로 이민 간 나영과 한국에서 나영을 그리워한 해성의 만남 사이에 인연이란 단어를 다각도로 활용했다. 유태오는 해성의 우울한 감정에 초점을 맞춰 연기했다.

“해성과 저는 ‘결핍’이 겹쳤어요. 다문화에서 자란 저는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에 한이 맺혀 있어요. 그 감정을 누구보다 잘 표현할 자신이 있어요. 해성은 어릴 적 첫사랑을 놓친 인물이에요. 쓸쓸함이 있죠. 제 장기를 발휘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유태오를 세상에 알려준 영화 ‘레토’(2019)에 출연했을 때만 해도 한국어 발음이 서툴렀다. 영화 ‘새해전야’(2021)나 넷플릭스 드라마 ‘연애대전’(2023)에서도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는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다. 여전히 ‘ㄹ’ 발음이 한글 속에 묻어있는 듯하지만,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노력이 드러나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ㄹ’ 발음은 선생님께 말해서 고치자고 해야 할 것 같네요. 의지대로 되지 않으면 ‘한’이 생기곤 하는데 한국어 발음이 특히 그래요. 어휘나 강약 조절이나 어미 처리 같은 걸 다 배워야 했죠. 정말 어려웠는데 요즘 깡이 생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어요.”

◇英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노미네이트, 킬리언 머피가 상 받는 게 맞아

유태오는 지난 1월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부문 후보로 지명됐다. 한국계 남자배우로는 최초다. 아울러 오는 11일(현지시각)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예비 후보까지 올랐다. 배우로서 의미 있는 성과지만, 유태오는 크게 감흥이 없다고 했다.

“저는 미래에도, 과거에도 살지 않아요. 현재에 집중해요. 런던에 갔는데, 누가 ‘수상소감 준비했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또 2시간 동안 수상소감 연습만 했어요. 결국 못 받았어요. 시상식을 즐기지도 못했고요.”

영화 ‘오펜하이머’의 킬리언 머피가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유태오는 이후 파티에서 킬리언 머피와 있었던 에피소드를 전했다.

“선배인 킬리언 머피가 상을 받는 게 맞아요. 저는 20년 전부터 그의 작품을 보면서 연기를 공부했어요.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용기를 내서 ‘당신이 상을 받아서 좋았다’고 말했어요. 동양적인 정서도 설명하면서 축하했죠. 저를 안아주더라고요. 좋은 순간이었어요.”

지난해 1월 선댄스 영화제를 시작으로 전세계 유수의 영화제를 휩쓴 ‘패스트 라이브즈’ 덕분에 유태오의 명성도 높아졌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그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유태오는 들뜨기보다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다.

“20년 동안 연기했지만, 아직 할리우드에선 신인이에요. 향후 5년간은 어떤 시상식에 후보가 돼도 절대 기대하지 말자는 생각이에요. 글로벌 영화계의 인정을 받는 게 먼저니까요. 아쉬운 소리 안 하게끔 확실히 제 실력을 보여줘야죠. 그다음에 후보가 되고 상을 타는 게 순서인 것 같아요. 그런 상황이 올 때까지, 그저 열심히 하는 거죠.”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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