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김용일 기자] ‘007작전’을 방불케했다. 위기에 놓인 한국 축구 최상위 단체인 대한축구협회(KFA)가 남자 A대표팀 새 사령탑으로 울산HD를 이끄는 홍명보 감독을 최종적으로 내정하는 데엔 48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KFA는 7일 오후 2시9분 출입기자단에 차기 A대표팀 감독으로 홍 감독을 내정했다고 문자 메시지를 통해 밝혔다. 지난 2013~2014년 A대표팀 지휘봉을 잡고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한 홍 감독은 10년 만에 다시 A대표팀을 이끌게 됐다. 대표팀은 지난 2월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이 물러난 뒤 5개월 만에 새 수장을 앉히게 됐다. 감독 선임 작업을 마무리한 KFA 이임생 기술이사 겸 기술발전위원장은 8일 오전 10시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홍 감독 선임에 관한 브리핑을 연다.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데 장시간이 걸렸다. 대표팀 감독을 선임하는 KFA 전력강화위원회는 정해성 위원장을 중심으로 지난 2월 처음 소집해 차기 사령탑 후보 리스트를 만들었다. 당시에도 홍 감독은 국내 지도자 중 최상위 후보자였는데, 전력강화위는 외인 지도자를 우선으로 접촉하기로 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더딘 행보였다. 전력강화위는 지난 4월 제시 마시 감독을 최우선 협상자로 두고 접촉했지만 연봉 등 기본 조건에서 어긋났다. 그는 캐나다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이밖에 헤수스 카사스, 브루노 라즈 등 다른 후보와는 긴밀한 협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3월과 6월 A매치 기간 각각 황선홍, 김도훈 임시 감독 체제로 A대표팀 운영한 전력강화위는 원점에서 다시 후보군을 만들었다. 무엇보다 마시 감독 등과 협상 실패를 통해 현실적으로 협상이 가능한 인물을 선별하기로 했다. 뛰어난 명성과 커리어를 지닌 외인 지도자를 품기엔 KFA 재정 등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또 손흥민(토트넘) 이강인(PSG) 등 세계적 수준의 선수가 이전보다 즐비한 만큼 대표팀 운영 연속성이 떨어지는 외인 지도자만 내세우지 말고 국내 지도자도 재검토하자는 데 의견이 모였다.

지난달 3일 8차 회의에서 12명의 후보를 정리했다. 그리고 18일과 21일에 각각 열린 9,10차 회의를 거쳐 4명으로 좁혀졌다. 홍 감독을 비롯해 이라크를 지휘하는 카사스 감독과 우루과이 출신 거스 포옛 감독, 독일 출신의 다비드 바그너 감독이 이름을 올렸다. 호주를 이끄는 그레이엄 아놀드 감독과 국내에서 자주 거론된 김도훈 감독은 높은 점수를 얻지 못해 최종 면접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전력강화위에서 여러 견해가 오갔다. 정해성 위원장이 종합적으로 최종 순위를 매겼는데, 홍 감독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각급 대표팀에서 성공과 실패를 두루 경험한 것과 더불어 최근 성숙한 지도력으로 울산을 K리그1 2연패로 이끈 점 등을 높게 여겼다. 또 KFA의 현실적인 조건 역시 일정부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었다.

그런데 정 위원장이 홍 감독을 최우선 협상 대상자로 보고하는 과정에서 KFA 고위 관계자와 불협화음이 발생했다. 이때 거스 히딩크 감독이 KFA 관계자에게 추천한 것으로 알려진 아놀드 감독을 지지하는 라인이 존재한다는 얘기가 떠들썩했다. 정 위원장은 지난달 28일 전격적으로 사임 의사를 전했고, KFA는 이임생 위원장에게 업무를 맡겼다.

그러나 전력강화위 무용론이 확산하며 일부 위원 역시 사임 의사를 전했다. 더는 감독 선임을 지체할 수 없던 KFA는 이 위원장에게 지난 2~4일 포옛, 바그너 감독과 현지 대면 면접을 지시했다. 그는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때 최종 결정권자인 KFA 정몽규 회장은 최우선 협상 대상자 선정을 비롯해 사실상 선임 전권을 부여했다. 감독 선임 과정을 둘러싼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 위원장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다시 외부에 이름이 거론된 홍 감독은 KFA 감독 선임 시스템을 공개 비판했다. 유럽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이 위원장의 만남 제안도 거절했다. 그러나 이 위원장은 지난 5일 귀국한 날 홍 감독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당시 홍 감독은 수원FC와 원정 경기를 치른 뒤 다음날 휴식일을 고려해 서울 근교 자택으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이 위원장은 KFA가 그간 지속해온 문제를 인정하고 내부적으로 홍 감독이 꼭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했다. 정 회장의 뜻도 포함됐다.

홍 감독은 밤을 지새우며 고민했다. 이때 이 위원장은 울산 김광국 대표에게도 KFA의 입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울산 구단은 홍 감독과 긴밀하게 상의했다. 어느 순간 홍 감독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임을 직감했다. KFA의 선택에 울산 구단주를 겸하는 권오갑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도 대승적인 결단을 내렸다. 홍 감독이 7일 오전 KFA 관계자와 최종적으로 조율한 가운데, 권 총재는 오후 1시40분께 홍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A대표팀 복귀를 응원했다.

이 위원장 귀국 이후 이틀도 채 되지 않아 홍 감독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KFA는 30분 뒤 출입기자단에 내정 사실을 알렸다.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 주역 등으로 화려한 현역 생활을 보낸 홍 감독은 지도자로도 2009 이집트 U-20 월드컵 8강, 2012 런던올림픽 동메달 신화 등을 이끌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다가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1년도 채 남겨두지 않고 KFA의 소방수 제안을 받아들였다가 조별리그에서 탈락, 지도자로 첫 실패를 맛봤다.

2017~2020년 KFA 전무이사직을 수행, 행정가로 시야를 넓혔다. 그리고 2021년 말 울산 지휘봉을 잡고 현장에 돌아왔다. 성공과 실패 경험을 두루 녹인 그는 농익은 지도력으로 울산을 K리그1 2연패로 이끌며 재기에 성공했다.

선수 시절부터 아시아 축구의 아이콘으로 지낸 그는 여러 차례 대표팀 사령탑직을 두고 고사 뜻을 전했으나 벼랑 끝에 몰린 KFA의 메시지를 더는 나몰라라 할 수 없었다. 결국 심사숙고 끝 ‘특급 소방수’로 A대표팀 지휘봉을 다시 잡고 지도자로 사실상 마지막 항해에 나서게 됐다. 한국 축구의 운명은 다시 홍 감독에게 맡겨졌다. kyi0486@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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