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슬기 우승 트로피 들고 포즈 취하는 정슬기 (3)
정슬기가 생애 첫 우승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용인=스포츠서울 유인근 선임기자]펄펄 날다가도 마지막 날 우승을 앞두고 찾아오는 울렁증에 명암이 갈렸다.

9일 경기도 용인 써닝포인트 컨트리클럽(파72)에서 막을 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KG·이데일리 레이디스 오픈에서 그놈의 울렁증 때문에 희생양이 된 것은 1,2라운드 선두에 올랐던 우승 후보 김지영(22·SK네트웍스)이었다. 투어 3년차로 장기인 장타를 앞세워 강자로 자리한 김지영은 지난해 5월 NH투자증권 레이디스 챔피언십에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한 이후 더는 승수를 쌓지 못하고 있다. 올시즌에도 초반 선두로 나섰던 두 차례 대회에서 우승 기회가 있었지만 2위와 6위에 그쳤다. 실력에 비해 초라한 성적은 바로 우승 울렁증 때문이다. 그는 “우승 기회가 오면 몸이 좀 굳어지고 긴장한다”고 고백했는데 이번에도 우승 울렁증을 피해가지 못했다. 이날 대회 마지막 3라운드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울렁증 때문에 지키기만해도 됐을 우승컵을 허무하게 내주고 말았다. 1, 2라운드 합쳐 12개의 버디를 잡고 단 1개의 보기만 했을정도로 단단했던 김지영의 플레이는 3라운드 초반부터 널을 뛰었다. 전반 2, 5번홀에서 보기를 한 뒤 후반 첫 홀인 10번홀에서도 다시 보기를 해 공든 탑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반면 우승의 영광은 울렁증을 극복한 데뷔 3년째인 무명 정슬기(23)의 몫이 됐다. 3년 동안 상금 40위 이내 진입해본 적 없는 철저한 무명이었던 정슬기는 생애 첫 우승을 달성하며 새로운 신데렐라의 탄생을 알렸다. 최종일 버디 4개, 보기 2개로 2타를 줄여 최종합계 10언더파 206타로 공동 2위 그룹을 1타 차로 제치며 정상에 우뚝 섰다. 2016년과 2017년 한 차례씩 2위를 기록한 것이 가장 좋은 성적이었던 정슬기는 올시즌 ‘톱10’에 한 번 진입한게 전부였고 이 대회 전까지 상금랭킹 57위로 시드 보유를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이날 KLPGA 데뷔 후 77번째 대회 만에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면서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됐다. 시즌 전체 상금 7000여 만원보다 많은 우승상금 1억원을 손에 쥐었고 앞으로 2년간은 시드 걱정 없이 투어에 남을 수 있게 됐다.

2라운드에서 5타를 줄이는 맹타로 선두 김지영에 3타 뒤진 공동 4위로 마지막 라운드를 출발한 정슬기는 전반 4번홀(파4)에서 첫 버디를 잡으며 추격에 나섰다. 우승후보였던 김지영, 배선우(24)가 보기를 쏟아내며 부진한 틈을 타 단숨에 우승경쟁에 뛰어든 정슬기는 후반들어 3년을 기다렸던 샷을 폭발했다. 10번홀(파4)과 12번홀(파3)에서 버디를 추가해 순식간에 단독 선두로 올라서더니 14번홀(파5)에서도 1타를 더 줄여 2위 그룹과 4타 차로 앞서나갔다. 위기도 있었다. 막판 저주와도 같은 울렁증이 찾아왔다. 16번홀(파3)에서 첫 보기를 하더니 17번홀(파4)에서 연달이 보기를 해 순식간에 1타 차로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리고 마지막 18번홀(파4) 1m짜리 파 퍼팅을 남겨뒀다. 실패하면 5명의 2위 그룹과 연장전을 벌여야 했다. 극에 달한 울렁증으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지만 그는 흔들리지 말자 마음을 다잡았고 침착하게 퍼팅을 했다. 다행히 볼은 그대로 홀로 빨려들어갔고 정슬기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토록 기다렸던 짜릿한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김지영은 뒤늦게 15번홀 버디로 1타 차로 따라붙었지만 18번홀에서 4m 버디 퍼팅에 실패하며 지긋한 울렁증에 진저리를 쳤다.

정슬기는 “순위표를 보지 않고 내 경기에만 집중했다. 노력이 보상을 받은 것 같아 기쁘다. 어렵게 투어에 입성한 만큼 시드 걱정을 던 게 가장 좋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다. 그때 우승컵 들고 꼭 달려가겠다고 어머니와 약속했다. 비록 지금 어머니는 먼 곳으로 떠나셨지만 나를 지켜보면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한다. 어머니께 감사드린다. 우승트로피를 들고 어머니에게 가장 먼저 가겠다”며 중학교 때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그리며 진한 눈물을 흘렸다.

최근 6개 대회에서 우승 한 번을 포함해 모두 5위 이내에 입상한 배선우, 통산 8승을 올렸지만 2016년 이후 부진에 빠진 이정민(26), 김자영(27), 16번홀(파3) 더블보기에 발목이 잡힌 하민송(22), 김지영까지 5명이 1타 차 공동2위 그룹에 이름을 올렸다.

ink@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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