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장강훈기자] “370m까지는 쳐봤어요.”

야드로 환산하면 약 404.6야드다. 300야드만 날려도 장타자로 불리는데 400야드를 보내면 파괴자급이다. 때문에 드라이버 헤드를 2주에 한 번꼴로 교체한다. 스윙 스피드도 빠르지만, 임팩트 구간에서 강한 힘을 쓰다보니 헤드 표면이 금세 울퉁불퉁해지기 때문이다. ‘장타 혁명의 시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정찬민(24·CJ)은 “거리는 포기할 수 없다”며 웃는다.

스포츠서울이 창간 38주년을 맞아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 장타왕 정찬민을 만났다. 지난 17일 일본 치바현에 있는 이쓰미골프클럽(파73·7625야드)에서 열린 하나은행 인비테이셔널(총상금 10억원) 때였다. 한·일 장타대결로 관심을 끈 이 대회에서 정찬민은 2라운드 합계 4오버파 150타로 컷오프를 넘지 못했다. 낙담할 법도 한데 밝은 표정을 유지하며 “다음주 코오롱 한국오픈에서 잘 치면 된다”고 호탕하게 웃었다.

◇하쿠나마타타 지나간 일은 이미 끝

그는 “지나간 일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안좋은 결과를 받아들였는데 낙담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면 도약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일본에서 대회한 건 국가대표 때 이후 처음이다. 국가대표 시절에도 딱 한 번 일본에서 대회를 치러봤다”며 웃은 정찬민은 “이번 대회도 경험의 일환으로 받아들였다. 날씨도 괜찮았고, 생각보다 덥지 않았는데 그냥 내가 못해서 떨어진 것”이라고 툭툭 털어냈다.

성적이 들쑥날쑥한 이유를 알기 때문에 고민도 깊게 하지 않는다. 대회 전 연습 때도 몸풀듯 가볍게 샷한 뒤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간다. 그는 “(볼이) 살 곳으로 보내면 성적이 좋고, 세컨드, 서드 샷을 아무리 잘해도 보기를 할 수밖에 없는 곳으로 보내면 망한다. 그게 골프”라고 말했다. 방향성, 코스 매니지먼트 등이 중요하다는 의미인데, 정찬민은 “방향성과 매니지먼트 능력을 갖춰가는 과정”이라고 덧붙였다.

◇골프가 만만했던 거구 좌절금지

방향성과 코스 매니지먼트를 동시에 이루려면 다른 무언가는 포기해야 한다. 코리안투어 선수들 실력이 그렇다. 원하는 곳으로 멀리 보내고, 코스매니지먼트까지 완벽하면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서 우승 경쟁해야 한다. 정찬민은 “기량을 더 가다듬어서 PGA투어에 진출하는 것이 목표다. 지난해도 콘페리투어 퀄리파잉 스쿨에 참여했고, 올해도 도전할 생각”이라며 “PGA투어든 아시안투어든 빅리그로 가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큰 무대에 도전하는 것은 모든 선수의 꿈이다. 정찬민은 “크게 좌절했기 때문에 목표가 더 구체화했다”고 전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친을 따라 골프장에 갔는데, 재미삼아 휘둘러본 클럽의 ‘손 맛’에 매료됐다. 그는 “공이 맞아나갈 때 손맛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아버지께 골프시켜달라고 졸라 여기까지 왔다”고 회상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평범한 체격이었는데, 중학교 진학 후 30㎝가 자랐다. 신장뿐만 아니라 체격도 커져서 매주 샤프트를 교체했을 정도로 성장 속도가 빨랐다. 그는 “키와 힘이 동시에 커지니 샤프트가 감당을 못하더라. 3년 동안 샤프트만 7개 정도 교체한 것 같다”며 웃음지었다. 또래보다 월등한 신체조건을 가졌으니, 비거리도 엄청났다. 중학교 시절부터 ‘장타자’ 소리를 듣던 그는 2017년 일송배 한국주니어 골프선수권대회 우승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살려만 놓자는 마음으로 세게 쳐요

고교 때 일송배와 송암배를 휩쓸며 ‘거물’로 주목받으며 2019년 태극마크를 반납하고 프로로 전향했다. 아마추어 무대를 평정했던 그가 프로에서 우승한 건 전향 후 2년 만인 2021년. 스릭슨투어 12회 대회에서 프로 첫 우승을 따내고 20회 대회에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해 코리안투어 진출권을 손에 쥐었다.

코리안투어에서도 좀처럼 톱10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다가 지난 5월 치른 제42회 GS칼텍스 매경오픈에서 우승했다. 그는 “아마추어 때는 골프가 참 쉬웠다. 표현이 좀 그렇지만 ‘나는 골프를 잘한다’고 취해있었던 것 같다. 호기롭게 프로에 입문했을 때도 ‘언제든 우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대 만만한 무대가 아닌데 자만했다. 한 마디로 큰 코 다쳤다”고 돌아봤다.

코리안투어는 나흘간 걸어서 라운드해야 하고, 국내에서 골프 잘하는 선수가 경쟁하는 곳이다.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베테랑도 있고, 국가대표 선배들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무대다. “코스 매니지먼트의 중요성, 멘탈관리의 중요성을 크게 깨달았다.”

하지만 장타자는 원하는 곳으로 공을 보내는 게 쉽지 않다. ‘더 멀리, 더 강하게’라는 의식이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코스에는 볼이 살 곳과 죽을 곳이 있다. 미스샷이어도 살 곳으로 공을 보내면 파 세이브에 유리하다. 이걸 아는데도 죽을 곳으로 공을 보낸다. 리커버리 능력이 빼어나도 보기를 할 수밖에 없는 곳으로 볼이 날아간다”며 웃었다. 프로전향 초기에는 원하는 곳으로 공을 보내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멘탈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래서 찾아낸 답이 “지나간 것은 빨리 털어버리고, 현재에 집중하자”였다. 그는 요즘도 “볼을 살려만 놓자는 마음으로 강하게 친다”고 껄껄 웃었다.

이 마음이 가장 잘 통한 대회가 GS칼텍스 매경오픈이었고, 감격적인 코리안투어 첫 우승을 거뒀다. 그는 “국가대표 시절 매일 훈련하던 곳이어서 익숙했다. 대회 때는 이상하게 긴장을 하나도 안해서 ‘이게 맞나’하면서 플레이했다. 공이 살 곳으로만 날아가니 우승한 것”이라며 “프로전향 후 했던 마음고생을 한 번에 날려버린 순간이었다.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털어놨다.

◇체격, 비거리 향상에 큰 영향

다시 한번 우승 순간의 짜릿함을 맛보고 싶은 게 눈앞에 놓인 목표다. 그는 “서두를 생각은 없다”면서도 “매 대회 우승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나선다”고 전했다. 코오롱 한국오픈이 끝나면 짧은 방학이 있는데 이때는 숏게임 훈련에 조금 더 매진할 생각이다. 티샷을 멀리 보내놓으면 숏 아이언이나 웨지로 그린을 공략한다. 그린주변에서 이뤄지는 섬세한 플레이는 스코어로 이어진다. 그는 “드라이버 샷보다는 숏게임 훈련에 훨씬 크게 비중을 둔다. 손 감각이 좋은 편이어서 꾸준히 훈련하면 좋아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래도 장타는 포기할 수 없는 정찬민의 ‘아이덴티티’다. “체격이 커지면서 비거리가 늘었다. 어느정도 체격이 있어야 장타를 칠 수 있다.” 거구일 필요는 없다는 게 정찬민의 생각이다. 신장은 타고나야 하는데, 힘과 순발력을 기르는 건 후천적인 노력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콘페리투어에서 경쟁하던 선수들은 나보다 작은 체구인데도 장타를 때려내더라. 몸 스피드가 빠르고, 이를 감당할 만큼의 체격을 가진 선수들”이라며 “체격이 비거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확신이 생겼다”고 밝혔다. 주니어 선수들도 비거리 증가를 위해 체계적인 웨이트트레이닝 등으로 체격을 키워야한다고 조언했다. 체격을 키워 원하는 만큼 드라이버 비거리를 낼 수 있으면 코스 매니지먼트로 스코어를 줄일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어느 정도 비거리가 뒷받침돼야 PGA투어 등 큰 무대를 노릴 수 있다.

◇수염 덕 캐릭터 생겨, PGA 명예의 전당이 꿈

정찬민은 “어릴 때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개성이 없다고 해야하나. 캐릭터가 없으니 눈에 띄지 않았다”며 웃었다. 관심받는걸 좋아하는 괴력의 장타자가 크게 주목받지 못하니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박준성 감독님과 얘기하다가 ‘수염을 길러보라’고 권유받았다. 구레나룻과 수염이 이어지는 게 흔하지 않은데, 이어지더라. ‘이거다’ 싶어 길렀는데, 캐릭터가 됐다.당분간은 면도할 생각 없다.”

그는 “선수로서 최종 목표는 PG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꿈을 이루기 위해 매일 최선을 다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는 “PGA투어 명예의 전당 헌액은 선수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뤘다는 의미다. 돈, 명예, 우승 다 가진 사람만이 들 수 있는 곳”이라며 “자고로 꿈은 크게 가져야 한다”고 호탕하게 웃었다.

급한 성격에 플레이가 성에 차지 않으면 욱할 때도 있는데 숨을 크게 쉬거나 캐디와 대화하며 마음을 가라앉힌다는 정찬민은 “코스 매니지먼트도 잘하고, 비거리도 유지하면 늘 우승권에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장타자라는 이미지뿐이지만 섬세하고 영리한 선수라는 찬사를 들을 때까지 자신을 담금질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매경오픈 우승 후 안좋은 모습을 더 많이 보여 팬들께 죄송하다. 컨디션을 최대한 올려서 이른 시간 내에 더 좋은 모습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기대해주시고, 응원 많이 해 달라”고 당부했다.

zzang@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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