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원성윤 기자] 가수이자 학전 대표 김민기가 지난 21일 별세하면서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SBS에서 지난 5월 방송된 다큐 3부작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는 김민기가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을 설립한 배경부터 과거 중앙정보부 감시를 받고 이를 피해 농촌으로 내려간 상황까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며 감동을 남겼다,

방송에서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송창식, 조영남,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노찾사), 임진택(연극연출가) 등 오랜 지인들을 비롯해 박학기, 장필순, 강산에, 윤도현, 설경구, 황정민, 장현성, 이정은, 안내상, 이종혁, 김대명, 이선빈 등 학전이 배출한 아티스트들은 물론 학전 스태프였던 강신일(총무부장), 정재일(음악감독) 등 각계 인사 100여 명 인터뷰가 담겼다.

다큐에 참여한 김명정 작가는 ‘스포츠서울’과 인터뷰에서 “김민기에게 심리적 빚을 진 배우 등이 모두 한달음에 달려와 카메라 앞에 섰다”며 “몸값을 키워 영화판에 간 죄송스러움이 한데 모였다. ‘언제라도 갈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다 투병 소식에 모두 달려왔다”고 말했다.

배우 설경구, 황정민, 이정은, 장현성 등이 카메라 앞에 흔쾌히 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설경구는 “김민기 선생님을 만난 건 내 인생 최대 행운”이라고 뭉클함을 전했다. 황정민은 “학전이라는 곳은 20대 때 불타는 에너지를 방출했던 나의 첫 직장이었고 극단이었다”고 회고했다.

학전소극장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우로 배우와 스태프를 대했다. ‘연극은 배고픈 직업’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다. 장현성은 “김민기 대표님보다 아들, 딸 같이 어린 배우들이 돈을 훨씬 많이 가져가기도 했다”라고 직급이 아닌 기여도에 따라 수익을 배분했던 시스템을 설명했다.

연출자 삶 이전 가수로서의 삶은 가시밭길이었다. 김민기는 서울대 회화과 2학년 때 ‘아침이슬’이 담긴 솔로1집 앨범을 발매해 평생 곤욕을 겪었다. 서슬 퍼렇던 유신정권 시대, 이 곡은 저항의 상징으로 불렸다. 결국 앨범은 판매금지됐고 김민기는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당했다. 1980년 신군부 집권 후에는 아예 종적을 감췄다. 그는 당시 경기 연천군 미산면에 민간인 통제 구역에서 농사꾼으로 살았다.

한 번도 농사를 지어본 적 없는 김민기는 동네 사람들에게 같이 일하고 모내기하며 어우러졌다. 김민기는 “하루 24시간이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모든 게 좋았다”고 술회했다. 그의 비상한 머리는 농촌에서도 번뜩였다. 당시로서는 낯선 생산자와 소비자 유통 판로를 활성화했다. 다큐에서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 시기의 김민기를 조명해 먹먹함을 더했다.

목동 시가지로 변한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서 야학을 운영했던 경험도 소개됐다. 서울대 회회과 출신인 김민기는 미술을 가르쳤다. 낮에 노동하고 손이 퉁퉁 부은 아이들이 야학을 찾았다.

당시 야학에서 김민기와 함께 지도했던 이인용 전 삼성전자 사장은 “저항의 심볼처럼 되었지만, 사실 그가 바란 것은 조금 더 좋은 세상, 조금 더 따뜻한 세상”이라며 “김민기 선배는 그저 그가 만든 노래 ‘상록수’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입을 모았다. 이 생활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아침이슬’ 이력 탓에 또다시 야학에서도 빠져나와야만 했다.

대신 김민기는 어린이를 위해 유아원 설립을 하기로 마음먹고 콘서트를 개최했다. 자취를 감춘 그를 보기 위해 티켓이 3000장이나 팔렸다. 당시 강남 아파트값보다 큰 300만원이 모였다. 이렇게 설립된 ‘해송어린이집’은 최초의 공공육아 목적 어린이집이다. 오전에 50명, 오후 50명을 받았다. 후원금도 모으며 어린이집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김민기도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면서 극단 ‘학전’ 대표로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된다. 유홍준의 한국 미술사 강연,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등도 학전에서 탄생했다.

철저하게 ‘뒷것’을 자처하며 무대 뒤의 삶을 살아온 김민기의 삶을 조명한 SBS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이 다시 한번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다. socool@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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