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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서울 도로명에 충무로, 세종로 등이 있다면, 전주에는 태조로, 견훤로, 정여립로 등이 있다. 정여립(1546~1589)하면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라는 천하공물설,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 라는 하사비군론과 같은 당시로는 혁신적인 사상을 표방했다. 정여립이 오늘날 도로명에 등장한 이유는 당시엔 반역이었으나 오늘날엔 달리 해석된다는 것이다.
1589년 10월, 정여립과 대동계가 한강이 얼 때를 기다려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한양으로 진격하기로 했다는 장계가 조정에 날아들었다. 조정이 체포령을 내리자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 후 관군에 포위되자 정여립은 땅에 칼을 세위 목을 스스로 찔러 자살했다는 기록과 관군이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의 집터는 파가저택(죄를 범한 자들이 살던 집을 불사르고 그곳에 연못을 만들어 후대에도 집을 짓고 살지 못하게 만드는 조선시대의 최고 형벌) 되어 지금은 흔적만이 남아있다. 1589년 기축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은 정여립의 자결로 일단락되었고 그 뒤처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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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선조
기축옥사의 명분은 ‘정여립 모반 사건’ 가담자 처벌이었지만 사실은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부족한 선조가 입지를 강화하고자 동인을 토벌한 대참극이었다. 선조는 상소의 내용을 문제 삼지 않는 다는 구언교지(求言敎旨)를 내렸다. 봇물 터지듯 상소가 몰려왔다.
당초 기축옥사의 위관(재판장)은 우의정이었던 정언신(1527~1591)이었으나 정여립과 9촌지간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어 정철(1536~1593)로 교체되었다. 정철은 병을 이유로 거듭 사양하였으나 선조는 내관을 3차례나 보내 입궐을 재촉했다.
결국 선조는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가 목숨을 버리는 예를 들며 “가마에 실려서라도 적을 토벌하라”며 정철을 위관에 임명했다. 그리고 3년간 10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어 사형이나 유배를 당해 조정에는 일할 관리가 부족할 정도였다.
정여립의 정(鄭)자만 들먹여도 붙잡아 죽였다. 임금에게 미움을 받으면 유배를 갔고 집안 간 원한이 맺히면 왕래를 끊고 담을 쌓았다. 이를 ‘세혐(世嫌)’이라 하여 기록으로 남겨 후손에게 전했다. 역사적으로 세혐의 관계를 넘어 견원지간이 된 집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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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과 바꾼 눈물
조대중(1549~1590)이라는 지방 관료는 전라 도사가 되어 부안의 관기를 대동하고 보성에 이르러 서로 이별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에 하인이 지체하는 것을 지루하게 여겨 ‘현재 울고 있는 중이니 어느 겨를에 길을 떠나겠는가’ 하였는데, 이 말이 와전되어 대중이 정여립의 죽음을 듣고 정여립을 슬퍼한다는 소문이 났다. 조대중은 정여립의 일파로 몰려 국문을 받다가 이듬해 장살(杖殺)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속 기록에서 옥사로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지만, 가장 황당하고 억울하게 죽은 이는 김빙(1549~1589)이란 인물이다. 정여립의 시신을 국문장에 가져와 책형(찢는 형벌)을 가할 때 백관(百官)이 둘러서서 보게 되었다. 김빙은 추국관으로 추국을 하다가 지병으로 계속 눈물을 흘렸다.
김빙이 눈물을 흘린 이유는 그날 날씨가 매우 춥고 건조한데다 바람이 많이 불어 눈물이 났던 것이다. 평소에도 이미 눈병을 앓았다고 기록돼있다. 같은 서인 이었음에도 김빙과 적대관계였던 백유함(1546~1618)이 역적을 동정하여 운다고 무고하여 김빙은 곤장을 맞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병이 나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무엇이 죄일까만은 때와 장소가 좋지 못했다.
<역사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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