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아이돌은 노동자라고 생각하나요?”, “아이돌에게도 노동자의 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어떤 색을 좋아하나요?”, “악플러는 왜 고소를 취하했나요?”

영화 ‘진리에게’는 꽤 오랜 시간 故 설리(본명 최진리)의 뜸 들이는 시간을 담았다. 영화의 3분의 1 이상이 설리가 대답을 고민하는 장면이다. 정윤석 감독의 질문에 설리는 ‘어~’, ‘음~’으로 시간을 끌고, 눈을 올리고 생각하거나 미간을 찌푸리며 답을 생각해낸다.

긴 시간 뜸을 들이고 난 뒤 나오는 대답은 명쾌하지 않다.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하나요?”라는 질문에 ‘네’라고 비교적 빨리 대답한 설리는 “그러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나요?”라는 대답엔 한동안 답을 못했다. 긴 기다림 끝에 “우월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라고 짧게 말했다.

설리의 생전 모습을 담은 이 다큐멘터리는 대체로 이러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각각의 질문에 설리는 어렵게 대답을 꺼내곤 했다. 이 외에도 페미니즘, 노브라 논란 등 민감한 질문을 서슴없이 던진다. 예민한 질문일수록 기다림의 시간은 길어졌다.

중간중간 뜬금없이 웃기도 하고, 갑자기 눈물을 쏟아내기도 한다. 설리는 인터뷰 도중 그 의중을 정확히 설명하지 않았다. 어딘가 뚝뚝 끊겨 있는 이 인터뷰를 보고 있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이렇게 보기 힘든 인터뷰를 담은 것엔 감독의 의도가 숨어있다. 정윤석 감독은 설리가 대중으로부터 가벼운 인물로 취급받았던 건 그가 고민하는 모습이 의도적으로 잘린 편집된 영상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별다른 고민 없이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하는 모습만 보여, 설리가 가진 진실한 얼굴이 가려졌다는 뜻이다.

감독은 질문을 받고 대답할 때까지 기다리는 과정을 모두 담아내며 설리가 자신의 의견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내비치고 있는가를 전달하려 했다. 대화 중 설리는 자신의 대답이 시원치 않다고 느낀 듯 “저는 제 생각이나 주장을 얘기해도 되는지 몰랐어요”라는 말했다. 이 짧은 말에 오랫동안 타인의 의견과 주장을 따르며 살아온 인생이 느껴진다.

평소 자신의 속내를 꺼내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관객은 큰 공감을 받을지도 모른다. 특히 후반부 ‘말 잘하는 방법’을 검색한 설리는 블로그에 적힌 글을 읽는다. 한참을 읽은 설리는 “전 그냥 말 못 하는 사람 할래요”라고 마무리했다.

말을 조리 있게 하는 것에, 자신의 정돈된 생각을 담담히 전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관객이라면 설리의 자신 있는 행동이 도전적으로 느낄 수 있다. 요즘같이 화술이 중요한 시대에 말 못 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의외로 속이 뚫리는 장면은 설리가 생전 출연했던 JTBC2 ‘악플의 밤’ 일부분이다. 원더걸스 출신 핫펠트가 게스트로 출연한 회차다. 오디오가 끊기지 않는다는 게 꽤 큰 기쁨으로 다가오는 장면이다.

대화가 오고 가던 중 갑자기 페미니스트가 주제로 떠올랐다. “페미니스트 맞냐”는 신동엽을 비롯한 MC들의 질문에 조심스럽게 “맞다”고 대답하는 핫펠트를 지켜보던 설리가 갑자기 속내를 전하기 시작한다.

설리는 “여성의 인권과 남성의 인권이 동등하다고 생각하나요? 그러면 그게 페미니스트예요”라고 어필했다. 신동엽은 “그러면 저도 맞아요”라고 약간은 당황스럽다는 어조로 대답했다. 영상은 이 부분에서 페이드 아웃이 된다.

감독은 그 장면이 설리를 대변하는 장면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심플하게 자기주장을 하는 모습을 보고 설리에게 ‘멋있다’고 전한 적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확고하게 믿는 부분만큼은 진솔하고 정확하게 속마음을 전하는 설리가 보인다. 이전 인터뷰 때와는 사뭇 다른 지점이다. 감독이 왜 하이라이트에 이 장면을 넣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악플의 밤’이 지나가면 설리의 곡 ‘도로시’가 퍼지고, 다소 몽환적인 애니메이션이 나온다. 그 은유가 무엇을 말하는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설리의 음악이 꽤 긴 시간 흘러나오는 부분에선 왠지 모를 미안함과 뭉클함이 생긴다.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관객이 있는가 하면, 과연 이 영화가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되는 것이 올바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관객도 있다. 설리가 살아있었다면 이 영화가 개봉되길 바랐을지 의문이라는 시선이다.

‘진리에게’는 유족의 동의 하에 개봉한다. 고인의 생전 모습을 담았다는 점에서 우려가 나올법한 내용과 소재다. 상업성을 목적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등의 감독을 향한 비판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런데도 고인이 되기 전 오랫동안 설리를 지켜본 감독의 진심이 전달된다면, 감독의 말처럼 영화 ‘진리에게’는 설리를 추억하는 수많은 진리에겐 의미 있는 영화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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