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기자]등장할 때마다 공기를 바꾸는 배우들이 있다. 아무런 대사가 없어도 존재만으로 전반전과 후반전을 나누는 듯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아우라가 있는 힘 있는 배우는 스크린을 뚫고 나온다. 허준호도 존재감이 짙은 배우다.

지난 20일 개봉한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는 배우 허준호의 힘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가 연기한 명나라 부도독 등자룡은 이순신(김윤석 분)을 유독 아끼는 인물이다. 비록 언어는 다르지만 뜨거운 우정을 나누고, 이순신의 뜻대로 먼저 일본군과 싸운다.

긴 수염에 흰 머리를 착장한 등자룡의 얼굴에서 무인의 힘이 오롯이 전달된다. 오랫동안 운동으로 연마한 육체를 바탕으로 액션도 거뜬히 해냈다. 이순신과 필담을 나누며 우정을 확인하는 순간은 잔상이 깊다. 허준호는 ‘노량: 죽음의 바다’가 영광이고 감동이었다고 했다.

허준호는 지난 21일 서울 종로구 소재의 한 커피숍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순신 3부작에 출연하게 된 건 영광이다. 겨울 대작에 참여하고 싶어서 배우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영화도 감동스러웠다. 잠시 잊고 살았던 이순신 정신을 일깨웠던 기회였다”고 말했다.

◇“조선에 파견 나온 등자룡, 왜 목숨을 걸었을까요?”

이 영화가 다룬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다. 철수 명령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일본군과 필사적으로 섬멸하려는 조선군, 조선을 도와주러 왔지만, 피해는 보고 싶지 않은 명나라의 각기 다른 욕망이 충돌한다.

명나라 도독 진린(정재영 분)이 조선과 일본군 사이를 오가며 실리를 추구하는 가운데 등자룡은 “무조건 싸워야 한다”는 결기를 보인다. 그리고 끝내 진린의 명령을 무시하고 먼저 참전한다. 조선의 후예로서는 감동이 밀려온다.

“등자룡이 궁금했어요. 남의 나라에 파견 나온 사람이 어떻게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선택을 했는지 의문이었어요. 자료를 찾아봐도 몇 줄 안 나와요. 고민 끝에 이순신과 관계로 접근했어요. 믿을 수 있는 동생이자, 목숨을 던져서라도 힘이 되고 싶은 의인인 거죠. 등자룡의 용맹은 관계로 해석했어요.”

워낙 많은 배우가 등장하는 터라 허준호도 분량이 많지 않다. 초반부에는 진린과 아리마(이규형 분)가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후반부에는 해상 전투신이 몽땅 가져간다. 초반부에서 일부, 액션 장면에서 짧게 등장할 뿐이다. 어쩌면 이 작품은 허준호에게 꼭 득이 될 작품은 아니다. 그런 허준호의 마음을 움직인 건 김한민 감독의 열정, 그리고 이순신과 필담 신이다.

“감독이랑 처음 미팅해서 이 영화 어떤 거냐고 질문을 툭 던졌어요. 그랬더니 두시간 동안 당시 역사를 얘기하더라고요. 미팅 뒤 작품하겠다는 말도 안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죠. 감독의 열정이 마음에 남아있었고, 또 등자룡과 이순신이 필담으로 속마음을 나누는 장면이 참 좋았어요.”

◇“배우는 백도화지여야 돼, 색은 현장에서 입히는 것”

일본과 명나라 군인을 연기한 배우들은 하나 같이 언어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100% 외국어 연기를 펼쳐야 했다. 해당 언어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은 경우 뜻도 모른 채 감정을 담아야 했다. 연기 경력 40년에 육박하는 허준호에게도 생소한 경험이었다.

“힘들었지만 신났어요. 그냥 외우는 수밖에 없죠. 다른 배우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쓴 것 같긴 한데, 저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만 했어요. 재영이나 저나 중국어에 치이니까 수다를 안 떨었죠. 처음엔 재영이가 계속 밥만 먹고 집에 가 길래, 오해도 했었어요. 내가 뭐 실수했나 하고요. 중국어가 힘들어서 그랬더라고요.”

배우들은 대체로 자신이 어떤 선택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머리를 기르거나 운동을 꾸준히 한다. 최대한 자신의 색을 빼고 살아가려고 한다. 허준호 역시 그런 삶을 지속한지 오래됐다. 최근에 바뀐 점이 하나 있다면, 소속사 스태프들의 의견을 진중하게 듣는 것이다.

“예전에는 고집도 셌고, 말도 잘 안 들었어요. 2~3년 전에 스스로 꼰대라는 걸 확인했어요. 남의 말도 안 듣고 가르치려 들더라고요. 게다가 작품 보는 감각도 떨어진 것 같았어요. 대화하다 보면 제가 뒤처져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감각적인 사람들에게 맞춰서 살려고 해요. 저는 이제 밀린 세대니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맞춰야죠.”

‘결백’(2020), ‘모가디슈’(2021),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2023)까지 출연하는 작품마다 강렬한 잔상을 남겨 왔다. ‘왜 오수재인가’(2022), ‘사냥개들’(2023)과 같은 드라마에서도 진면목을 발휘했다. 40년 내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아우라가 있다니 다행이죠. 제가 잘 하고 있나 봐요. 저는 어떻게든 작품에 어울리는 연기에 대한 답을 찾는 사람이에요. 저 보러 귀한 시간 내고 표 사서 오는 분들이 있는데 허투루 하면 안 되죠. 배우는 백도화지예요. 색깔이 없어야 해요. 색은 현장에서 입히는 거예요. 배우는 백도화지여야 한다는 게 제 소신이죠.”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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