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주로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영화를 연출해온 정지영 감독은 늘 실화라는 양날의 검을 쥐었다.

공권력을 이용한 사법부의 횡포를 그린 ‘부러진 화살’, 1985년 고문으로 사람들의 눈과 귀, 입을 막은 안기부의 속살을 그린 ‘남영동 1985’, 자산 가치 70조 은행이 1조 7000억원에 넘어간 희대의 금융 스캔들을 다룬 ‘블랙머니’가 그것이다.

실화는 힘 있는 이야기와 논리적 개연성을 담보하는 반면, 이미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터라 기시감을 동반한다. 어떻게 영화적으로 재밌게 풀어내느냐가 관건이다.

신작 ‘소년들’에서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비롯해 각종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서 화제가 된 ‘삼례 나라슈퍼’ 사건을 스크린에 옮겨왔다. 1999년 무고한 시민에게 살인자의 누명을 씌운 공권력을 겨냥했다

승진을 목적으로 졸속으로 일을 처리한 경찰과 검사로 인해 살인자 누명을 쓴 무고한 소년 세 명의 아픈 사연을 다룬다. 1999년 충분히 진실을 바로잡을 수 있었지만, 진실과 마주하기 부끄러웠던 경찰과 검사때문에 세 명의 소년은 17년 동안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다.

사건은 잘못을 잘못이라 ‘정론직필’하는 정감독의 대쪽같은 성품을 건드렸다. 2000년 전북 익산시에서 벌어진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에서 활약한 경찰 캐릭터를 ‘소년들’에 끌고 들어와 상업영화의 묘를 선보였다. 마치 영화 ‘공공의 적’의 강철중처럼 황소처럼 진실에 달려드는 인물이다. 강철중을 연기한 설경구가 정지영 감독과 작업하고 싶은 마음으로 참여했다.

삼례읍 소재의 한 슈퍼에서 할머니가 사망한 사건이 났다. 몰래 돈을 훔치려다 할머니까지 죽은 것이다. 1999년, 과학 수사가 발달하지 못한 세기말 시골 경찰들은 막막했다.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언론도 연일 대서특필했다. 경찰의 위신이 뚝 떨어진 가운데 영웅처럼 나타난 이가 있다. 완주경찰서 수사반장 최우성(유준상 분)이다. 단 5일 만에 용의자 세 명을 검거, 자백을 받아냈다. 졸속과 조작의 합작품이다.

최우성은 승진했고, 그 빈자리엔 전주에서 날고 기는 황준철(설경구 분)이 왔다. 경찰 생활에 매진하던 중 우연히 제보를 받는다. “나라슈퍼 사건에 진범을 알고 있다”는 것.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 황준철은 제보자를 만나고, 그 사건을 다시 들춘다. 하지만 녹록지 않다. 졸속으로 처리한 경찰이 수뇌부에 있고, 할머니의 딸 미숙(진경 분)도 소극적이다.

황소 같은 황준철은 끝내 진범까지 잡아내지만, 부끄러움을 인정할 줄 모르는 검경의 방해 공작이 한발 앞섰다. 겁에 질린 세 명의 소년은 “내가 살인을 했다”고 말하고, 진범은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 공권력의 횡포가 너무 많은 사람들을 파국으로 이끈다. 황준철은 17년 동안 외딴섬으로 좌천됐다. 그리고 다시 완주경찰서로 돌아온다. 진실이 서서히 고개를 내민다.

영화는 크게 두 갈래다. 1999년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와, 2016년 진실을 마주하는 시기다. 앞부분은 마치 스릴러 장르물 같고, 뒷부분은 법정물에 가깝다. 사건이 일어날 땐 격한 감정이 요동치지만, 뒷부분에는 인물들의 나이도 많아져 숨이 죽은 느낌이다. 정지영 감독은 두 시기를 교묘하게 섞는다. 무려 6가지 버전이 있을 정도로, 편집에 공을 들였다. 덕분에 복잡한 구조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매끄럽게 전달된다.

무고하게 누명을 써 살인자라고 손가락질받으며 고통 속에 살아온 세 소년과 그들을 보호하는 미숙, 경찰로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외딴섬에서 고독하게 지낸 황준철 등 여러 인물의 복합적인 감정도 적절히 잘 드러난다. 정지영 감독이 새기는 인장이 뭉클하게 다가오는 건 감정이 켜켜이 잘 쌓은 덕분이다.

꾸준히 경찰만은 피하려고 노력했던 설경구는 초라한 얼굴을 보인다. 젊은 시절은 노련하고 정제된 강철중이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다. 후반부 황준철은 쓸쓸해 보인다. 고독하고 외롭고 힘도 없다. 대신 시야와 안목, 통찰이 늘었다. 세상을 초월한 강직함이 엿보인다. 여유롭게 새 얼굴을 만든다. 황준철의 눈으로 사건을 보는 이 영화에서 완벽히 길잡이 역할을 한다.

눈에 띄는 건 허성태다. 매사 과장된 리액션을 보이는 박정규에게 묘한 자연스러움을 얹는다. 독특하면서도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 인물을 만든다. 덕분에 묵직하게만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박정규 덕분에 숨통이 툭툭 트인다. 진경과 유준상, 조진웅도 안정적인 여기를 펼치며, 김동영과 유수빈, 서인국 등 젊은 연기자들의 파릇파릇한 연기가 극을 풍성하게 만든다.

이미 아는 사건임에도 충분히 재밌게 즐길 요소가 많다. 특히 황준철이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졌다. 실제와 상상이 공존하는 가운데 결과적으로 관객의 여러 감정을 건드린다. 비록 뻔한 결말일 수 있지만, 그 결말로 가는 과정에 노장의 멋과 철학, 통찰이 세련되게 스며들어 있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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