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울산=김용일 기자] “마흔 살까지 축구하고 싶어요.”

늦게 핀 꽃이 더 아름답다. ‘만추가경(晩秋佳景)’의 아이콘인 축구국가대표 스트라이커 주민규(34·울산HD)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웃음 속엔 간절한 마음도 담겨 있다. 뒤늦게 꿈을 이루면 누구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일게다. 주민규 역시 어안이 벙벙한데, 베테랑답게 현실을 직시하면서 더 나은 목표를 그렸다.

주민규는 울산 동구에 있는 울산HD 클럽하우스에서 가진 스포츠서울 창간 39주년 인터뷰에서 “주변에서 2026 북중미 월드컵도 가야 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물론 마음속엔 있을지라도 ‘1’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현재에 충실하며 많은 골을 넣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SNS 배경부터 케인과 나란히…“사실 엄청 팬이다”

지난 3월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을 앞두고 국가대표 최고령 최초 발탁(33세 333일) 기록을 쓴 주민규는 태국전에서 최고령 A매치 데뷔(33세 343일), 지난 6일 싱가포르전에서 34세 54일 나이에 데뷔골을 맛봤다. 한국 축구 최고령 A매치 데뷔골 역대 2위.

득점보다 그의 가치가 더 빛난 건 싱가포르전에서 나온 ‘도움 해트트릭’이다. K리그에서 입증한 것처럼 최전방에 머물지 않고 2선까지 내려와 공을 소유하며 손흥민(토트넘) 이강인(파리 생제르맹)의 침투를 유도하고 송곳 같은 패스로 득점을 만들어냈다. 득점과 기회 창출에 두루 능한 잉글랜드 골잡이 해리 케인(바이에른 뮌헨)을 연상하게 하는 활약이다. 그는 ‘주리케인’이라는 새 애칭을 얻었다. 특히 케인은 2022~2023시즌까지 토트넘에서 손흥민과 뛰며 최고의 공격 듀오로 활약했다. 주민규가 손흥민의 골을 돕는 장면이 케인과 무척 닮아 팬들은 더 환호했다.

주민규는 “이상적인 플레이스타일로 여기는 것이 케인이다. 득점 뿐 아니라 킬패스로 파이널 서드까지 진입하는 것을 보면 남이 갖지 못한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2년 전 그라운드에서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당시 방한한 토트넘과 친선전을 치른 팀K리그(올스타) 일원으로 뛴 그는 케인의 위력을 실감했다. 당시 케인이 멀티골을 넣은 토트넘이 팀K리그를 6-3으로 제압했다. 주민규는 “힘이 정말 세더라. 그리고 (슛) 임팩트가…”라며 “한 번은 왼발로 해결하는데 슛 템포가 아니었다. 들어가는 걸 보고 웃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휴대폰을 꺼내 자기 SNS 배경화면을 보였다. 당시 케인과 나란히 서 있는 뒷모습이다. 주민규는 “계속 간직해왔다. 지금도 여전히 롤모델이고 팬”이라고 방싯했다.

◇“(이)강인이가 형이 나이 가장 많은데 왜 과일 떠오냐고…”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대표팀에 이르게 녹아드는 건 쉽지 않다. 주민규는 “(뽑히기 전부터) 국민의 한 사람으로 대표팀 경기를 꾸준히봤다. 경기에 들어가기 전 내가 파악한 선수의 장점을 기억하고 돕겠다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주장 손흥민을 비롯해 조현우, 엄원상 등 대표 생활을 먼저 해온 울산 동료의 배려도 따랐다. 그는 “내가 낯을 많이 가린다. 또 나이가 많아 당장 어울릴 사람이 없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동생들이 다가와 줬다”며 고마워했다.

지난 소집 기간 막내급 일원인 이강인을 잊지 않는다. 소집 기간 식당에서 주민규가 이르게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디저트 코너에서 과일을 가져와 동료와 나눠 먹었다. 이를 바라본 ‘대표팀 선배’ 이강인은 주민규에게 한마디 했단다. 그는 “강인이가 ‘형이 나이 가장 많은데 왜 (과일을) 직접 떠오느냐’고 하더라”고 웃더니 “내가 ‘나이가 뭐가 중요하냐. 나중에 너도 나이 들면 형처럼 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강인이나 다른 동생들이 먼저 장난도 건다. 처음엔 나도 조심스러워했는데 생각보다 다들 순수하고 좋더라”고 덧붙였다.

◇“스트레스 나랑 나누자” 정신적 지주 아내…은퇴해도 축구하고파

2020년대에만 K리그1 득점왕을 두 번(2021·2023)이나 해낸 주민규는 이상하리만큼 태극마크와 연을 맺지 못했다. 파울루 벤투, 위르겐 클린스만 등 외인 사령탑은 그를 외면했다. 주민규의 상처는 커졌다. 내심 표현하지 않아도 그만큼 힘든 건 가족이었다. 주민규는 “아내나, 부모, 장인, 장모 모두 자기 자식이 최고이지 않느냐. 메시, 호날두보다 늘 내가 최고라고 생각해 주는 게 가족”이라며 “(대표팀에) 계속 못 뽑히니 내 눈치 보고 힘들었을 것”이라고 돌아봤다. 또 “내가 말을 잘 안 하고 속으로만 애태우는 데 어느 날 아내가 ‘스트레스를 같이 공유하면 반으로 나뉘는데, 왜 100% 홀로 짊어지려고 하느냐’고 하더라. 고맙고 감동했다. 솔직하게 표현하니 정말 스트레스가 줄더라”고 말했다.

가족의 진심 어린 응원 속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리그에서 활약했다. 오랜 기다림 속에 올해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달았고 데뷔골도 넣었다. 여전히 아내는 정신적 지주다. 그는 “아내가 이번에 대표팀 갈 때 ‘마지막일 수 있으니 즐기고 와’라고 하더라. 그만큼 부담을 주지 않는다”고 미소 지었다.

주민규는 지난 3월, 최근 중국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치른 월드컵 예선에서 나온 6만 함성을 떠올렸다. “정말 운동장에서 감정이 (리그와) 다르더라. ‘이래서 대표팀에 오려는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저절로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더라”고 했다.

태극마크는 그에게 더 또렷한 목표치를 던졌다. “마흔 살까지 하고 싶다”고 입을 연 주민규는 “축구 자체를 정말 좋아한다. 한계를 두지 않고 도전하고 싶다. 은퇴하더라도 축구할 것 같다. 누군가는 은퇴하면 질려서 안 한다는데 50대가 돼서도 조기 축구회에 나가서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스포츠서울 창간 39주년을 축하하면서 ‘더 아름다운 꽃이 되겠다’는 다짐을 남겼다. kyi0486@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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