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조은별기자] 영화 ‘건축학개론’(2012)에서 첫사랑에 실패해 서글픈 눈물을 흘렸던 소년은 어느덧 11개의 직업을 가진 택시운전사로 성장했다. SBS 드라마 ‘모범택시2’에서 악인 척결을 위해 매 번 새로운 ‘부캐’(부캐릭터의 준말. 본업 외 다른 직업을 일컫는 은어)로 변신한 배우 이제훈(39)의 이야기다.

‘모범택시2’는 모범택시 운전사 김도기(이제훈 분)를 비롯, 무지개운수 직원들이 억울한 피해자들을 대신해 ‘사적복수’를 대행해주는 드라마다. ‘시즌2’ 최종회 시청률은 21%(닐슨코리아 전국기준)로 올해 지상파, 케이블 채널에서 방송된 드라마 중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사이비 종교, 클럽 내 마약 유통 및 성범죄 등 실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사건 등을 다루며 현실의 솜방망이 처벌 대신 가해자들을 철저히 응징한 게 인기 비결로 꼽힌다. 때마침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신이 배신한 사람들’ 등이 방송돼 사이비 종교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높을 때였다.

2019년 빅뱅 승리, 가수 정준영 등이 연루된 ‘클럽 버닝썬’ 사건을 연상시키는 ‘클럽블랙썬’ 사건 역시 강남 학원가에 마약 음료가 유통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드라마와 현실의 타이밍이 시의적절했다.

“드라마고 허구의 이야기지만 실제 사건이 모티프인 만큼 전달방식에 대한 고민이 컸다. 마약 사건 등은 피해자가 반복 발생하니 향후 유사사건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드라마를 통해 경각심을 키우고 잘못과 상처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했다.”

OTT 왓챠에서 ‘블루 해피니스’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던 이제훈은 ‘모범택시’ 시즌2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며 창작자로서 면모를 뽐냈다. 일례로 SBS 드라마 ‘천원짜리 변호사’의 남궁민이 카메오로 출연한 것도 이제훈의 아이디어와 섭외로 이뤄졌다.

“드라마 ‘스토브리그’의 열성 팬이었다. 어느날 ‘스토브리그’가 결방된다는 소식에 개인 채널에 아쉬움을 토로했더니 당시 이세영 역의 박은빈 씨에게 연락이 왔다. 이후 ‘스토브리그’에 특별출연한 게 연이 되면서 남궁민 선배와 친분을 쌓았다. 남궁민 선배가 먼저 ‘천원짜리 변호사’ 특별출연을 요청하면서 나도 우리 드라마에 선배를 모실 수 있게 됐다.”

김도기가 전작보다 더 많은 부캐릭터로 활약한 것도 이제훈의 아이디어다. 영농 후계자, 법사, 죄수, 의사, 가드 등 다채로운 직업의 세계를 능청맞게 표현했다. 이제훈은 “배우로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줄 수 있고 또 다른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수많은 부캐릭터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로 단연 ‘왕따오지’를 꼽았다. ‘왕따오지’는 시즌1에서 재중동포 출신 보이스피싱 조직의 수장 림여사(심소영 분)를 응징하기 위해 이제훈이 분한 중국 흑룡강 출신 동포로 마성의 매력을 자랑하는 인물이다. 이제훈은 “가능하다면 ‘왕따오지’를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며 웃었다.

이제훈은 김도기에 대해 ‘소시민적 영웅’이라고 애정을 표하면서도 “이런 인물을 꿈꾸는 현실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는 “억울하고 힘든 상황에 놓인 이들이 많지만 모두 구제하기 힘든 게 현실”이라며 “그래서 ‘모범택시2’를 통해 문화 콘텐츠의 사회적 영향력을 더욱 깊이 체감했다”고 말했다.

‘모범택시2’에 앞서 유품정리사의 사연을 그린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무브 투 헤븐: 나는 유품 정리사입니다’(2021) 등 사회적 울림을 주는 작품에 연달아 출연한 것도 같은 이유다.

이제훈은 “배우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중이 무엇에 관심을 갖는지 살펴야 한다. 나 역시 작품을 선택하는데 사회적인 분위기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답했다.

최근 그가 관심을 갖는 소재는 ‘코인(가상화폐)’이다. 이제훈은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파동 당시 높은 가치가 매겨졌던 튤립의 값이 하락한 것처럼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코인에 대한 부정적 이슈를 ‘모범택시’에서 다루면 의미있을 것 같다”고 아이디어를 냈다.

연기자, 창작자 외 이제훈의 또다른 부캐는 경영인이다. 2년 전 1인 기획사 ‘컴퍼니온’을 차린 그는 최근 신인 연기자 김은비 등을 영입하며 매니지먼트 영역을 확장했다. 가슴 한 구석에는 연출과 제작에 대한 꿈도 품고 있다.

이제훈은 “연출과 제작, 매니지먼트를 함께 하는 이정재, 정우성 선배가 나의 롤모델”이라며 “배우라는 존재의 영향력이 문화예술산업 전체에 미치는 만큼 생각이 더 깊어지고 있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우선 조만간 사내 연봉협상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웃었다.

mulgae@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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