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환-(~2000)
안정환이 지난 2000년 10월1일 열린 이탈리아 세리에A 2000~2001시즌 개막전 페루지아-레체 맞대결에서 페루지아 공격수로 선발 출전한 뒤 드리블하고 있다. 페루지아 | 강영조기자

[스포츠서울 김현기기자]K리그 MVP의 유럽 진출사는 도전과 고난의 역사였다. 국내에서의 화려함 대신 ‘눈물 젖은 빵’을 감수할 만큼 쉽지 않은 길이었으나 그들은 묵묵히 걷고 또 걸었다. 이제 이재성이 새로운 도전의 출발선 앞에 놓였다.

1983년 박성화부터 지난해 이재성까지 총 35명의 MVP 중 수상 뒤 축구의 본고장 유럽 무대를 노크한 선수는 이상윤, 안정환, 이천수, 김두현 등 4명이다. 1993년 일화(현 성남)의 K리그 첫 우승을 이끈 이상윤은 이후 5년이 지난 1999년 초 프랑스 1부리그 로리앙에 입단,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유럽 진출을 단행했다. 활약은 미미했다. 한국나이로 31살이어서 전성기가 다소 지난 상황이었고 임대 신분이란 핸디캡도 따랐기 때문이다. 통역도 없다보니 팀에 녹아들기 어려웠다. 5경기 무득점을 기록한 뒤 1년도 되질 않아 국내로 복귀했다. 스스로도 “프랑스 진출은 도피였다”고 나중에 고백했다.

그런 면에서 2000년 이탈리아 세리에A 페루지아에 입단해 한국인 최초로 이탈리아에 진출한 안정환은 진정한 K리그 MVP의 유럽 도전으로 부를 만했다. 1998년 대우(현 부산)에 입단한 그는 이듬 해 34경기 21골 7도움을 올리고 MVP를 수상한 뒤 ‘큰 물’에 가고 싶어했다. 결국 6개월 뒤 페루지아와 라싱 산탄데르(스페인)를 놓고 저울질하다가 페루지아를 선택했다. 당시엔 세리에A가 지금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처럼 세계 최고의 리그여서 안정환의 활약 여부가 더 주목받았다. 그만큼 부침도 컸다. 안정환은 개막전에 선발 출전한 뒤 훗날 이탈리아 국가대표가 된 파비오 리베라니에 밀려 고생했다. 그래도 유벤투스나 AC밀란 등 내로라는 강팀과의 경기에서 잘했다. 세리에A의 빠른 템포와 헤딩 등을 익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맹활약하는 발판을 다졌다. 페루지아에서 2년간 30경기에 출전해 5골을 터트린 안정환은 한·일 월드컵 이탈리아전 골든골이 도화선이 돼 페루지아를 떠났다. 이후 2005~2006년 프랑스 메츠, 독일 뒤스부르크에서 각각 6개월씩 뛰며 28경기 4골을 넣었다. 안정환은 크게 성공했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K리그의 한국인 공격수가 유럽에서도 통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천수와 김두현은 도전은 아쉬웠다. 스페인 라 리가에서 실패한 뒤 2005년 여름 울산 유니폼을 입은 이천수는 그 해 울산의 우승을 견인하며 MVP까지 삼켰다. 2007년 여름, 네덜란드 페예노르트로 이적해 스페인에서의 한을 풀고자 나섰다. 향수병 등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고 1년간 12경기 무득점의 초라한 성적표와 함께 2008년 수원으로 돌아와 다시 K리거가 됐다. 2006년 성남의 우승 주역으로 MVP를 차지했던 김두현도 비슷했다. 1년 뒤인 2007년 12월 잉글랜드 챔피언십(2부) 웨스트브로미치 알비언(WBA)에 임대로 진출한 그는 WBA가 그 해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하면서 정식 이적 계약까지 체결하고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다. 그러나 2008~2009시즌 부상이 겹치면서 프리미어리그 16경기 무득점에 그쳤고 2009년 여름 수원을 통해 국내에 복귀했다.

이렇듯 K리그에서 최고 대접을 받은 선수들에게도 유럽은 녹록한 곳이 아니었다. 우선 실력을 발휘할 여건이 여의치 않았다. 극심한 주전 경쟁을 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간 것도 아니어서 언어와 문화 등에 적응하는데 어려움도 겪었다. 연봉은 한국에서 받던 것과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이재성은 가장 최근 K리그 MVP란 점에서 안정환 케이스와 비슷하다. 하지만 2부리그를 선택한 점은 김두현 사례와 같다. 월드컵 뒤 유럽에 간 점을 고려하면 이천수와도 닮았다. 그러나 초심으로 돌아가 신인의 자세로 싸운다는 정신 자세는 예전 그 어떤 MVP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부지다. 공격 만큼 수비에도 능하다는 점에서 새로운 스토리를 쓸 수 있다

silva@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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