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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이지석기자]트로트 가수 금잔디(40)는 지난해 우리나이로 마흔이 됐을 때 행복함을 느꼈다. ‘이제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않을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남들이 좋다는 20~30대에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지냈다. 본인이 만져본 적도 없는 부모님 빚을 갚는데 16년이 걸렸고, 빚을 다 갚고 ‘이제 살만 한가’ 생각이 들 때 찾아온 공황장애와도 싸워야 했다. 이제 그의 꿈은 무대 위에서 ‘미친 광대’로 사는 것이다.

최근 만난 금잔디는 근황을 묻자 “전통가요 가수들은 1,2월이 비수기라 여행을 많이 떠난다. 그런데 나는 요즘 재활의학과에 다니며 재활 운동을 하고 있다”며 웃었다.

“어디가 아파도 그냥 달렸다. 일만 생각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슬슬 들더라”라는 그는 올 겨울 처음으로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제 운동을 하며 몸관리를 해야겠다’ 생각하던 찰나, 운동 전문가들에게 “지금 운동이 필요한 몸이 아니라 재활이 필요한 상태”라는 진단을 받았다. 금잔디는 “수십년간 차 안과 무대에만 있었더니 몸이 엉망이 된 거였다. 한창 바쁠 때는 하루에 22시간 차 안에만 있은 적도 있었다”고 되돌아봤다.

‘고속도로의 방탄소년단’, ‘트로트 행사의 여왕’으로 불리는 금잔디는 성인이 된 뒤인 1998년부터 ‘일’만 생각했다. “노래가 없었으면 나는 몇번 죽었다. 고비가 너무 많았다”고 되돌아봤다. 그가 밝힌 그의 20대, 30대는 ‘한(恨)’이란 단어가 아니면 정의내릴 수 없다.

1998년 그는 동덕여대 실용음악과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입학하지 못했다. 건설회사 경리를 하며 월급 60만원을 받았는데 어느날 무료 구직 정보지에서 ‘노래만 부르면 100만원’이란 광고를 보게 됐다. 출근을 하니 할머니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 된다는 거였다. 소위 ‘약장수’의 일을 돕는 거였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자주 ‘사고’를 쳤는데 당시 집의 가구들엔 빨간 딱지가 붙어있었다. 그는 ‘약장수’를 도와 노래를 부르며 돈을 모았다.

1999년 2년제였던 공주 영상정보대학 실용음악과에 ‘전액 등록금’ 제안을 받고 입학했다. ‘망부석’을 부른 가수 김태곤이 그를 도왔다. 하지만 생활비가 부족했다. 무턱대고 살던 동네인 강원도 홍천에서 가장 돈이 많은 어르신을 찾아가 생활비를 빌려달라고 했고, 도움을 받았다. 2년 장학생으로 학교 생활을 하며 방학 때 노래 부르는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부모님의 빚을 갚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사고를 치면 생활력 강한 엄마가 어떻게든 메우는 게 우리 집안의 패턴이었는데 계속 뭔가 터지고, 부도가 나니 엄마도 나중엔 어찌하지 못했다. 난 초등학교 때부터 ‘엄마는 왜 이 집에 살까’라는 생각을 했다. 1999년부터 집안의 빚을 갚는 게 힘들지 않았냐고? 엄마는 내 분신같은 존재다. 엄마가 도망치지 않고 살아가니, 내가 엄마를 도와야 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직후 돈이 없어서 가지 못했던 동덕여대에 결국 편입하게 됐다. 그러나 실용음악과가 아니라 방송연예과를 택했다. “예전에 어쩔 수 없이 가지 못했던 게 화가 나서 실용음악과에 가지 않았다”는 그는 방송연예과에서 무대 위 ‘연기’를 익혔다. 물론 학교만 다닐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MT도 한번 가보지 못했다. 캬바레나 나이트클럽 등 밤무대를 전전하며 돈을 모으고, 가족의 빚을 갚았다. 하룻밤 8군데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술취한 손님이 팁을 주면 비굴함을 느끼기 보다 ‘내 노래가 얼마나 좋으면 사비를 줄까. 내 노래에 누군가 위로를 받으니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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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잔디는 늘 일기를 쓰는데 최근 예전 일기장을 들춰본 일이 있다. 2003년 어느날 ‘금마차 캬바레’에서 노래를 부른 뒤 “노래, 너로 인해 버틸 수 있었다. 오늘도 너무 고마워”라고 적은 걸 발견했다. 금잔디는 “노래가 없었으면 순간 순간 뭘로 버텼을까. 이성 친구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여행, 친구, 수다도 알지 못한다. 난 아무 것도 못한다. 노래를 부르지 않았으면 매 순간을 어떻게 버텼을지 까마득하다”고 말했다.

기획사의 제안을 받기도 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지만 계약에 묶여있던 2004~2008년 무렵 소속사는 노래를 부를 공간이나 무대를 잡아주지 않았다. “나를 버티게 하는 건 노래인데, 3~4년간 잘못된 계약에 묶여 꼼짝도 못했다 그때 처음 우울증이 오더라. 햇빛을 싫어했고, 어둠이 깔려야 밥을 먹었다. 한마디로 폐인이었다.”

2008년 현재 매니저를 만난 뒤 일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가수로, 방송 리포터로, 때로는 연기자로 활발히 활동했고, 뮤지컬에 잠시 출연한 적도 있다. 부모님의 빚을 모두 갚은 줄 알고 엄마를 위해 작은 아파트 한채를 샀다가, 몰랐던 아버지의 ‘사채’가 발견돼 심한 빚독촉을 받고, 그 집이 경매로 넘어가는 일도 겪었다.

2015년 1월, 모든 빚을 갚은 뒤 그해 3월 엄마를 위한 집을 다시 사드리자마자 그해 3월 12일 공황장애가 그를 찾아왔다. 금잔디는 “16년간 빚을 갚던 생활을 청산하니 긴장이 풀렸었나보다”라고 되돌아봤다. 공포 영화를 무서워하지 않는 그는 그날 오후부터 몸이 이상함을 느꼈고, 밤에 무서워서 화장실을 못가는 경험을 하게 됐다. 며칠 동안 밥을 전혀 못먹고 행사 스케줄을 다니고 있다가 공황장애 판정을 받았다. 그해 11월 어느날 잠에서 깨보니 덜 무서웠고, 그렇게 병이 사라졌다. 그는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노래 부르는 걸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면 아마 죽고 싶었을 것이고, 이겨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우리나이 마흔이 된 뒤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그는 “나는 노래를 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노래로 많은 분들의 한(恨)을 대신 풀어주는 광대, 음악에 미친 광대가 되고 싶다. 금잔디의 몸뚱아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으로 무대 아래 객석의 관객들이 희노애락을 모두 느끼게 하고 싶다”고 다짐했다.

이번달 그는 신곡 ‘사랑탑’를 발표한다. “이제 살만하니까 꽃잎이 떨어지고 있다”, “봄이 오나 싶더니 단풍이 지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금잔디는 신곡 ‘사랑탑’에 대해 “신곡은 내 이야기가 담긴 가사나 다름없다. 아마 나 같은 인생을 사는 분이 많을 터라 공감을 느끼실 수 있을 것이다. 올해는 여러분과 사랑탑을 잘 쌓아나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monami153@sportsseoul.com

사진 | 올라 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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